[황규민의 먹고싸는 얘기] 내가 커피를 맛보고 이해하고 소비하는 방식

맛은 감각과 기억의 칵테일이다. 황규민 약사l승인2019.07.01l수정2019.07.02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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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커피에 대한 기억은 80년대 중반 대학을 입학한 지 얼마 안 된 3월 어느 날 오전 실험실습과 관련된 악몽으로 시작된다. 생맥주와 마찬가지로 대학 입학 전까지 나는 커피를 마셔본 기억이 없다. 객지 생활에 적응 안 된 20대 초반의 깡마른 남학생에게는 어젯밤 과음으로 인한 숙취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자취생으로서 당연히 아침을 굶은 공복상태였다. 봄이지만 저 위쪽은 추웠고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한 약골에게 그 추위는 진주의 한겨울 못 지 않았다.

때마침 같이 기다리던 같은 실험실습 조의 천사 같은 그러나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한 여학생이 커피를 한 잔 뽑아 주었다. 따듯했다. 쓴 맛이었다. 고맙고 부끄러운 마음에 단숨에 마시고 실습실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얼마 후 조교의 설명과 함께 실험을 시작해야 했다. 악몽의 시작이었다. 추위 긴장 공복 숙취에다가 카페인까지 더해 손이 떨려 비커를 포함한 실험 도구를 제대로 잡을 수가 없었다. 결국 실험은 같은 조의 그 여학생이 다했다. 조교의 눈치도 봐야 되는 미안하고 손 떨리는 지옥 같은 2시간의 실험실습은 그렇게 끝났다. 소변은 왜 또 그렇게 마려웠는지. 커피는 나에게 이렇게 악몽으로 각인되어 있다.

▲ 황규민 약사

지금까지 나에게 커피는 카페인이라는 각성물질로 소비되고 각인되고 이해되었다. 맛으로 따진다면 쓴맛이라는 미각으로만 인식되었다. 미각과 후각을 합친 풍미라는 맛은 화학물질을 지각하는 감각기관의 인식인데 그 중에서도 나는 주로 미각만을 활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커피를 맛있다고 하는 사람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맛이라는 게 미각 후각의 총화인 풍미뿐만 아니라 청각 시각 촉각 추억까지 포함한 물질적 정서적 인식의 총화라고 이해한 후에는 커피가 좋다, 맛있다, 색다르다는 사람들의 말을 이제 나는 이해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도 머리로서만 이해하는 것이고 아직도 나는 사실 미각을 넘어선 어떤 맛으로 느끼고 즐기지는 못한다. 어차피 미각과 후각은 생물학적 개체 특이성이 있어서 타고나는 것이고, 커피에 대한 나의 추억이라는 것 또한 그렇고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술을 알코올이라 칭하기도 하는데 약리학적, 의학적 용도가 아니라면 이 표현에 나는 심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생각나는 대로 나열해보면 소주, 맥주, 막걸리, 와인, 위스키, 꼬냑, 사케, 고량주 등 술의 종류는 수도 없이 많은데 이것은 역사 문화라는 측면과 재료의 다양성, 제조방식, 사용한 효모 등 때문이다.

농업과 함께 시작된 인류문명은 술을 다양화하고 특화하여 미묘한 향과 맛과 느낌의 차이를 추구하고 즐기는 방향으로 진화, 발전해왔다. 맥주 하나만 보더라도 나라마다, 지역마다 맛과 향과 색과 느낌이 다양하고 수제맥주까지 고려하면 그 종류를 셀 수가 없을 지경이다. 그래서 술을 단순히 주성분인 알코올만으로 지칭하는 것은 역사와 문화, 성분 물질의 다양성을 배제한 매우 획일적이고 부당한 처사인 것이다.

이렇게 술이 단순하게 알코올로 치부되는 것이 부당하듯 커피를 주성분인 카페인만으로 칭하고 쓴맛으로만 이해하고 소비하는 것 또한 매우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원두 생산지에 따라, 로스팅 방식에 따라, 마시는 방법에 따라 카페인 함량, 향, 파이토케미컬의 함량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내가 각성이라는 카페인의 약리효과를 위해 커피를 마시는 것과는 달리 다른 사람들은 아침 설거지 후의 휴식을 위해, 비오는 날의 우울감을 즐기기 위해, 3년 전 가을에 헤어진 그녀를 잊기 위해 혹은 그를 추억하기 위해, 고유의 맛과 향을 음미하기 위해 커피를 즐기기도 하는 것이다. 모든 것에는 남이 모르는 나의 경험과 차원이 있듯이 또한 내가 모르는 남의 경험과 차원이 있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과거의 악몽 같은 경험과 교과서에서의 학습과 직업적 특성에 의해 커피를 이뇨작용이 있는 각성 물질로 이해하고 소비하고 있다. 그래서 '아메리카노 핫' 외에는 거의 주문을 하지 않는다. 어차피 나에게는 그 맛이 그 맛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타고난 미각, 후각과 빈약한 감성 때문에 쓴맛과 각성효과 외에는 잘 느끼지 못하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개인의 생물학적 특성과 경험과 추억을 이해하고 존중하기에 다른 사람이 즐기고 감탄하는 좋다, 맛있다, 색다르다, 풍부하다 등의 표현과 경험을 존중하고 받아들인다. 다만 혀와 코와 가슴이 아닌 머리로만.


황규민 약사  pharmto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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