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妄言과 戲言, 그리고 助言

쌍욕(차명진)과 빈정거림(이언주)에 개무시(김문수)까지 당한다면 드디어 그건 당하고 당해서 한 없이 쭈그러든 몸에 모욕의 오물을 마침내 끓어 퍼붓는 것이 될 터. 청정한 마음과 티끌 하나 안 묻은 신체와 정신을 유지하려 그렇게 애써 왔는데 세월의 더께에 오물이 끼얹어지고 티끌이 거머리처럼 달라붙는다면 인간은 드디어 한계에 봉착한다. 그래도 진(瞋)과 치(痴)를 떨쳐야 하는 건 성깔이 없어서도 아니요 힘이 모자라서도 아니다. 그냥 어이가 없어서이다.

오랜 세월 수모와 모욕, 무시와 천시를 겪으며 미진수(微塵數)를 하나둘 쌓아왔던 우리는 수모와 모욕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았다는 자각이 오늘날, 어느 순간, 도둑처럼, 갑자기, 뒤늦게 찾아온 걸 느낀다. 그냥 이름이 수모와 모욕, 무시와 천시이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돈오점수(頓悟漸修)!!!

▲ 박흥준 상임고문

아울러 이 세상에 참을 수 없는 모욕은 없고, 견디기 힘든 시험은 조금 있고, 견딜 수 없는 시험은 주님께서 결코 주시지 않는다는, 육체와 마음으로 일찌감치 모두 검증된 매우 견고한 사실을 후대를 위해 청사(靑史)에 기록하기에 이른다. 누가. 내가? 정답은 우리이다. 우리가 함께 기록한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망언(妄言)을 못 견뎌 힘들어 하며 어린 시절을 일제히 보낸다. 생각날 것이다. 부모의 망언. “으이구 커서 무엇이 될 건지. 쯧쯔...” 다음은 누나의 망언. “너 그런 식으로 하면 나중에 굶어죽어” 이번엔 배우자의 망언. 무릎 꿇고 처분만 기다리는 우리에게 눈 언저리에서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이걸 때려? 응? 말어? 차라리 개하고 결혼할 걸. 개는 꼬리라도 치지... 소는 음메음메 울기라도 하지...”

직장상사의 망언은 또 어떻고. “나가 죽어 임마. 너를 마지막으로 믿은 내가 잘못이지. 제에길!!” 이런 망언을 연거푸 듣고 안팎 곱사등이가 된 우리에게 끝내 남아서 우리를 괴롭히는 건, 포기하려야 우리가 인간인 한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그 무엇. 바로 자존심이다.

숙제를 내 주시고 다음 날 운동장에 집합시킨 뒤 회초리로 손바닥을 찰싹찰싹 때리시던 선생님의 망언도 모두들 기억할 것이다. “한 번 더 속아본다. 한 번 더 믿는다. 그리고오... 내일은 숙제와 함께. 에에 또... 기성회비도 가져오기 바란다” 그러나 내일은 또 다른 오늘이고 모레에도 역시 오늘이 계속되고 우리는 우물물 한 두레박을 꿀꺽꿀꺽 마시고 생고구마를 나누어 반 개씩 씹었는데 두어 번 속아보신 선생님은 그냥 체념하시고 방과 후 막걸리집에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우리에게 목격된 뒤 먼 훗날 정년을 1년 앞두고 아깝게 돌아가셨다.

망언이 주제인 요즘. 오랜 세월 망언과 함께 밥을 먹고 망언과 함께 세월을 삭였던 우리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상천외한 망언이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는 걸 매 시간 보면서 “졌다”를 반복하지 않을 수 없다. 상상을 초월하는 망언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아니. 내년 이맘 때까지는 계속될 전망이다. 선거가 있으니까. 장담한다. 분명 계속된다.

다음에 기다리는 망언은 아마 이런 것이 될 전망이다. “사회주의가 완성됐다” 이런 망언도 이어진다. “경제가 폭망했다. 우리 모두 굶어 죽고 맞아죽는 일만 남았다” 이런 망언도 이어지지 싶다. “ 더 이상 인민재판 하지 말라” 이런 망언이 아마 망언의 끝을 장식할 것 같다. “자신이 보수라고 생각하는 놈들은 모두 일어서라. 저 숭악한 빨갱이 쉐이들 싹 쓸어서 우리 해방의 불을 밝히자”

망언인 줄은 그들도 안다. 왜? 똑똑한 놈들이니까. 미국에서 공부 많이 하고 돌아온 놈들이니까. 그래서 망언이 더 필요하다는 것도 그들은 안다. 그러니 망언은 앞으로도 계속된다. 왜? 순수한, 아직은 때 묻지 않은, 아직은 어린 저 쉐이들을 분격시키는 게 필요하니까. 그래야 진보가 헛발질을 하고 그래야 ‘태극기 우리’에게 마지막 기회가 오니까.

똑같은 말인데도 망언과 희언(戲言), 조언(助言)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그건 애정이다. 애정을 밑바탕에 깔면 조언. 애정이 없으면 망언. 자신이 조금은 높은 위치라 생각하고 아랫것들 내려다보며 같잖은 말 한 마디 뇌까리면 그건 희언이다.

부모와 누나, 배우자와 선생님이 순번대로 차례차례 내뱉으셨던 말씀들은 지금 생각해 보니 조언이었다. 그리고 충언이었다. 직장상사의 망언도 어찌 보면 망언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 덕에 지금의 내가 서속(조)밥이나따나 한 술 뜨며 허기를 달래고, 동치미 한 사발 들이켜 갈증을 면하며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 있으니. 이제야 깨닫는다. 어렸던 내가 알지 못 했을 뿐. 당시에는 알지 못 했을 뿐.

조언 또는 충언이 아닌, 망언은 앞으로도 당분간은 계속된다. 어린 존심을 짓밟으며. 쭈우욱.. 망언에 흥분하지 말자. 자존심을 지키려면 흥분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 마침내, 끝내 이룬다. 그 날이 오면 망언을 일삼았던 그들도 너그러이 이해하고 용서하자. 눈높이 교육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들도 사람이니. 사람의 목숨은 누구나 소중하니. 그래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과연 그들이 사람일까 하는 의심을 지우지 못 하고 있는 탓인데 현 단계에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은 사람이 아닌 것 같다. 그냥 ‘사람에 가까운 그 무엇’이지 싶어서 마음이 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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