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익 칼럼] 독립투사 매도로 정체 드러낸 자유당과 조선일보

-약산 김원봉은 친일파 수구세력의 ‘아킬레스건’이다 최용익 전 MBC논설위원l승인2019.06.10l수정2019.06.10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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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6월 6일 현충일 추념사를 통해 맹렬한 의열단 활동으로 일제의 군경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약산 김원봉 선생을 평가한데 대해 자유한국당(이하 자유당)과 그 기관지 역할을 하는 조선일보 등 수구신문이 일제히 비난을 퍼붓고 나섰다. 이들이 문재인의 연설 중 문제를 삼은 대목은 다음과 같다.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10일 광복군을 앞세워 일제와의 전면전을 선포했습니다. 광복군에는 무정부주의세력과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이어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편입되어 민족의 독립운동역량을 집결했습니다. 그 힘으로 1943년, 영국군과 함께 인도-버마 전선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고, 1945년에는 미국 전략정보국(OSS)과 함께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던 중 광복을 맞았습니다. 김구 선생은 광복군의 국내 진공작전이 이뤄지기 전에 일제가 항복한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했습니다. 그러나 통합된 광복군 대원들의 불굴의 항쟁의지, 연합군과 함께 기른 군사적 역량은 광복 후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되고, 나아가 한미동맹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자유당 등 보수내지 수구세력을 대변하는 정당들이 일제히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 최용익 전 MBC 논설위원

황교안 대표와 나경원 원내대표는 “6·25 호국영령을 기리는 날에 남침을 주도한 김원봉에 대해 언급한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면서 사과문을 내라고 강요하는가 하면 김영우, 김진태 의원 등은 “현충일에 6·25를 일으킨 장본인 김원봉을 우리 국군의 뿌리에 끼워 맞춘다”면서 “(문재인이) 대한민국 정체성을 허무는 일에 골몰하더니 이제 커밍아웃을 하는 것이냐”고 비아냥거렸다.

아예 대놓고 욕설과 막말로 김원봉 선생을 욕보이는 자도 있다. 자유당으로 간판을 바꿔 달기 전전인 한나라당 시절 국회의원이었던 차명진이다. 차명진은 페이스북에 세월호 유가족을 “자식의 죽음을 팔아먹는 장사꾼‘이라는 식으로 모욕해 유명세를 탄 인물이다. 자유당에 이런 류의 독설을 퍼붓는 자들이 적지 않지만 차는 그 중에서도 망나니 급에 속한다. 차는 “자식의 죽음에 대한 세간의 동병상련을 회 쳐먹고, 찜 쪄먹고, 그것도 모자라 뼈까지 발라 먹고 진짜 징하게 해쳐 먹는다”고 힐난하는가 하면 “그들이 개인당 10억원의 보상금을 받아 이 나라 학생들 안전사고 대비용 기부를 했다는 얘기는 못 들었다”고 허무맹랑한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자식 시체를 팔아먹었다’는 표현까지 나왔다. 세월호의 진상 규명을 비판할 때 극우 네티즌들이 주로 사용하는 말과 자구(字句)까지 똑같다.

극렬 노동운동을 하다가 극우로 180도 방향을 바꾼 전 경기도 지사 김문수와 같이, 그의 보스인 김문수를 따라 극우 정치인으로 탐바꿈한 차는 김원봉은 물론이요, 현직 대통령에 대해서도 막말을 넘어 ‘놈’이라는 뒷골목 불량배 수준의 패악질까지 서슴지 않는다. 차는 “김원봉은 김일성 정권 권력 서열 3위, 6·25 남침 최선봉에 선 그놈”이라면서 “그런 놈을 국군 창설자라고 하다니 이보다 반(反)국가적, 반(反)헌법적 망언이 어딨는가? 그것도 현충일 추모사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이란 자가”라고 자못 비분강개의 수사를 날린다. 그러고는 예의 막말이 나온다. 그리고 ”우선 입 달린 의원 한 명이라도 이렇게 외쳐야 한다. ’문재인은 빨갱이!’”라고 대미를 찍는다. 고(故) 노무현이 평검사와의 대화에서 쓴 말마따나 “이쯤 되면 막가자는 얘기” 아닌가?

한통속인 조선일보가 가만있을 리 없다. 자유당의 주장을 즉각 엄호하고 나섰다. 조선일보는 1면 머리기사 제목을 “6·25영령 앞에서, 김원봉 띄우기”라고 뽑고, “김원봉은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했으나 해방 이후 월북해 김일성 정권에서 국가검열상 등 요직을 맡았고, ‘조국해방전쟁’(6·25)에서 공훈을 세웠다는 이유로 훈장을 받았다”고 했다. 이 신문 사설은 나아가 “6·25로 국토가 결딴나고 우리 국민이 떼죽음을 당했다. 사회 주류 교체가 필생의 숙원이라는 문 대통령이 이제 6·25 남침의 역사마저 거꾸로 뒤집으려 한다”고 비아냥거렸다. 사설은 “문 대통령은 ‘보수든 진보든 모든 애국을 존경한다’고 했다. 김원봉 찬양의 맥락에서 보면 북한의 ‘김씨 왕조’도 ‘애국’의 범주에 드나”라고 비꼬기도 했다.

기가 막힐 일이다. 더불어 그럴만하다는 생각도 든다. 조선일보는 명백한 친일신문이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때 친일파였던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는 1937년 경성방송국 시국강연에서 “일본제국은 지나(중국)를 절멸케 하여 극동 평화를 확립시키려 한다”고 말했고, 1944년 일본군에게 비행기를 헌납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의 창립 발기인 등으로 활동했다. 이광수, 최남선 등의 문인들과 김성수, 백낙준, 김활란 등의 교육자 등 사계 저명인사들의 대중을 향한 ‘징병, 징용 강권’과 ‘위안부(사실은 성노예일 뿐이었지만) 응모 권유’에 적극 가담, 편승함으로써 일제의 대동아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이 신문은 동아일보와 더불어 해방 후에 단 한 번도 이 같은 친일 민족반역 행위에 대해 공개 사과한 적이 없다. 프랑스 같았으면 해방과 동시에 문을 닫았어야 하지만, 미군정과 이승만 이후 역대 독재정권 하에서 기조를 이룬 반공냉전주의를 자양분 삼아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다. 후안무치하기 짝이 없다.

친일파들의 해방 후 행적은 많이 알려져 있다. 원래가 기회주의적인 이들이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는 심정을 미당 서정주는 정확하게 갈파했다. “해방이 도둑처럼 찾아왔다.” 이보다 더 적나라하게 해방을 맞는 친일파의 심정을 대변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 말의 본래 뜻은 단도직입적으로 “해방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이다. 적어도 “해방이 그렇게 일찍 찾아 올 줄은 몰랐다”는 의미다. 그러니 일본의 식민지 국민으로서 끽소리 말고 일제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 이들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즉, 일본의 노예로서 충실하게 살면 된다는 것이었다. 민족의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이나, 국권을 되찾기 위해 일본의 요인을 암살한다든가 하는 일은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자들인 것이다.

서정주 일생의 궤적을 살펴보면 친일파의 길을 걸었던 자들 또는 세력들의 일제하 행적과 해방 후 어떻게 변신하는지 그 행로를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은 지배세력이 누가 되든 오로지 살아남는 데에 달인 급의 테크닉과 처세술을 갖추고 있다. 그 기술의 핵심은 억강부약(抑强扶弱), 즉 힘있는 자들의 횡포와 부당함에 맞서 힘없는 자들의 편에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의 길을 걷는 것이다. 바로 강자 편에 서서 그의 이익을 위해 약자를 억압하는 억약부강(抑弱扶强)의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 때는 일본에 붙어 동족을 괴롭히고 독립운동을 탄압하며 그 대가로 호강을 누리다가, 해방이 되자 잽싸게 새로운 지배자인 미군정에 줄을 대 당시 일본인들이 한국 내에 떨구어 놓고 간 적산가옥이라도 한 채 챙기는데 빠지지 않았으며, 이후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 등으로 이어지는 독재자들의 통치 하에서도 역시 독재자들에게 밉보이지 않고 살아남는 기술을 발휘해 죽을 때까지 호의호식하는 것이다. 자유한국당은 해방 후 1988년 김대중 대통령으로 수평적 정권교체가 되기 전까지, 그리고 다시 2008년 이명박에서 2016년 말 현직 대통령으로 최초로 탄핵(파면)된 박근혜까지의 시기에 집권여당의 판박이이며 닮은꼴이다. 이승만의 자유당에서 박정희의 공화당으로, 그리고 전두환의 민정당을 거쳐 노태우가 김영삼과의 3당 통합을 이룬 민자당, 신한국당, 한나라당, 새누리당 … 자고 깨면 간판을 바꾸어 다는 통에 정당명을 기억하는 것도 쉽지 않을 정도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저 독재자들 자신이 미국이라는 대지주의 마름으로서 국민이라는 소작인들의 고혈을 빨아 미국에 상납하고 그 대가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 강화하는 억약부강(抑弱扶强)의 자세를 견지해온 것이다.

그렇다면 김원봉은 어떤 인물이며, 어떤 행적을 보였길래 친일파의 후예인 수구세력들이 대통령의 평범한 말 한마디를 빌미로 저렇게 길길이 날뛰는 것인가.

“약산 김원봉(1898~1958?)은 일찍이 의열단을 조직해 일제에 대한 ‘암살·파괴’ 활동을 시작했다. 의열단의 이념과 행동강령은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에 잘 드러나 있다. 이 선언은 당시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이승만 등이 주장하던 외교론, 자치론, 준비론을 통렬히 비판하고, 암살·파괴·폭동이 운동의 주된 방략이며, 조선총독부·동척·매일신보사 등 다섯가지 파괴할 곳(五破壞·오파괴)과 조선총독·일본군수뇌·매국노·친일파 거두 등 ‘죽일 놈 일곱’(七可殺·칠가살)을 적시했다.

의열단은 1920년 부산·밀양경찰서 폭탄투척(박재혁·최수봉)을 시작으로 조선총독부 폭탄투척(1921, 김익상), 상하이 황포탄의 다나카 기이치 대장 저격 미수(1922, 김익상·오성륜·이종암), 종로경찰서 폭탄투척과 도심 총격전(1923, 김상옥), 도쿄궁성 폭탄공격 미수(1924, 김지섭), 동척·식산은행 폭탄투척(1926, 나석주) 등을 감행해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

1941년 임정 참여를 선언한 약산은 그 이듬해 그가 이끄는 조선의용대를 광복군에 편입시키고, 자신은 광복군 부사령,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취임해 좌우합작 임시정부를 이룩했고, 해방과 더불어 서울로 들어왔다. 귀국한 김원봉은 혼란한 정세에서도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에 노력한다. 의열단 동지 유석현의 증언에 의하면, 그 무렵 그가 친일 경찰 노덕술에게 갖은 수모를 당하여 그 뒤 행로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노덕술은 ‘남로당이 주도한 파업에 연루되었다’는 죄목으로 약산을 잡아 ‘빨갱이 두목’이라고 뺨을 때리며 모욕했다는 것이다. 독립운동 거두가 친일 경관에게 수모를 당하고 풀려난 후 사흘을 꼬박 울며 “여기서는 왜놈 등쌀에 언제 죽을지 몰라”하며 한탄했다는 것이다. 1947년 7월 여운형이 암살된 후 그는 친일파와 극우세력으로부터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하였고 거처까지 옮겨 다녀야만 했다.”(“[이만열 칼럼]잊힌 독립운동가들을 생각한다, 한겨레 2018년 8월 17일”)

이런 경우가 있을 수 있는가. 풍찬노숙하면서 20여년을 중국 땅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해방을 맞아 돌아온 독립투사가 조국에서 환영을 받지는 못할지언정 일제의 하수인 노릇을 하던 친일경찰 노덕술로부터 따귀를 맞는 등 모욕과 고문을 당하다니 말이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일이 아닌가. 그런 나라를 제대로 된 국가라고 부를 수 있는가. 세월호 사건 때 유행했던 말, “이게 나라냐?”라는 탄식이 절로 나오지 않았겠는가.

그러니까 김원봉은 엄밀히 말하자면 스스로 월북한 것이 아니라 일제의 수족이었던 관료와 검경을 ‘통치의 편의를 위해’ 고스란히 다시 기용한 미군정과 이승만이 통치하던 대한민국이 내쫓은 것이다. 김원봉이 1948년 남북협상에 참여하고 평양에 남게 된 데는 이런 배경이 있다. 북한에서 그는 1948년 9월 북한 초대 내각의 국가검열상으로 입각했고, 그 뒤 노동상,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등을 역임했다. 더욱 불행한 일은 그런 중에도 6·25 때 납북되었던 조소앙, 안재홍 등과 인연을 맺고, 이들과 ‘중립화 평화통일 방안’ 등을 모색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1958년 11월 ‘연안파’가 숙청될 때 김원봉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누구보다 혁혁한 항일운동을 벌인 약산은 이렇게 사라졌고, 남북에서 잊힌 존재가 되어버렸다. 김원봉의 말로를 보면서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서 남한도 북한도 아닌 제 3국으로 가는 길을 선택한 주인공 이명준이 결국은 배 밖으로 투신하는 결말 부분의 장면이 연상되는 것은 왜일까.

언제 어디서 의열단원이 나타나 폭탄을 던지고 권총을 들이댈지 모르기 때문에 일제 군경과 관리들에게 의열단원은 염라대왕과 같은 존재로 인식되었다. 당연히 의열단장 김원봉은 일제가 가장 무서워한 독립투사 중 하나였다. 더 대단한 것은 그만한 병력을 이끌고 스스로 광복군에 편입했다는 점이다. 기득권을 포기하고 임시정부 광복군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그가 민족해방이라는 대의 앞에서 스스로를 기꺼이 희생했음을 의미한다. 라이벌일 뿐 아니라 이념적으로도 맞지 않는 김구를 중심으로 한 좌우합작인데도 말이다. 좌우합작과 통합의 정신을 이처럼 모범적으로 보여준 인물을 찾기는 쉽지 않다.

흔히 한국의 현대사, 좁혀 말해 해방 후 1948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분단된 뒤의 한반도 역사를 ‘뒤집힌 역사, 거꾸로 선 역사’라고 부른다. 잘 알다시피 국내에서 이념의 문제로 싸우던 세력들도 외세의 침략에 대해서는 한 마음이 되어 침략국을 상대로 공동투쟁을 벌이게 마련이다. 나라가 존재해야 이념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국공합작은 유명한 사례 아닌가. 이념을 떠나 조국의 해방을 위해 처절하게 싸웠던 독립운동가를 예우하기는커녕 편협한 이념의 잣대로 “6·25를 일으킨 장본인”이니, “6·25로 국토가 결딴나고 우리 국민이 떼죽음을 당했다”느니 하면서 찧고 까부는 자유당과 조선일보 등 극단적인 반공주의 세력이 약화, 소멸되지 않는 한 한반도의 미래는 암울하기만 하다.


최용익 전 MBC논설위원  choihan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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