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와 함께 걸으면 더 아름다운 둘레길

5월 봄 가뭄을 해소할 만큼의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에 운무 속 지리산을 만날 거라는 기대와 함께 비옷과 길동무들에게 들려줄 ‘봄비’라는 시 한 편도 챙겼다.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 비오는 둘레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봄비 / 박라연

사는 일이 너무 깜깜해,

아-악 소리치고 싶을 때

꽃잎 발소리처럼 빗소리 들리면

쩍쩍 금이 간 마음 너무 가벼워,

차라리 불지르고 싶을 때

비, 내려 나 아닌 다른 것들이라도 적시면

벚꽃 떨어져 이리저리 헤맬 때

혼자서는 흘러갈 수 없는 가느다란 봄비

그녀의 가냘픈 다리로

꽃잎, 그 헤맴을 감아올리려고 애간장 태우는 걸 보면

나도 몰래 내 숨 속에 내 거친 마음 가두네

숨이, 막, 끊어지기, 직전까지,

비의 사랑 한 가지 닮아 보고 싶었는데

봄비, 나를 춘몽 속으로 아득히 데려가네

 

▲ 5월 지리산 초록걸음에 함께한 사람들

모내기가 한창인 5월의 초록걸음은 인월면 중군마을에서 시작해 황매암과 배넘이재를 넘고 산내면 장항마을과 매동마을을 거쳐 상황마을까지 대략 11Km를 걸었다. 둘레길 초창기에 TV 프로 ‘1박2일’에 지리산 둘레길 3코스로 소개된 구간이기도 하다. 당시 TV 예능 프로에 둘레길이 소개되면서 둘레길이 생명 평화의 길이길 바랐던 이들은 사실 많은 우려와 걱정을 했었는데 밀려드는 관광객들로 인해 그 불길했던 예감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지금은 예전에 비해 둘레꾼들이 많이 감소되었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진정한 성찰과 치유의 길에 더 다가가고 있다고 느끼는 건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 5월 지리산 초록걸음에 함께한 사람들

빗속에서 걸음을 시작한 중군마을은 임진왜란 때 이곳에 중군이 주둔하게 되어 중군마을이라 부르게 된 곳이다. 조선시대 전투 군단은 전군 중군 후군과 선봉부대로 편성되었는데 중군이 이 마을에 주둔했던 것. 하지를 지나도 비가 오지 않으면 동네 부인들이 머리에 키를 쓰고 마을 앞 냇가에서 통곡을 하며 무제를 지내던 풍습이 있었다고도 전해진다. 중군마을에서 황매암을 지나면 수성대와 배너미재를 만나게 되는데 전설에 의하면 운봉의 배마을(주촌), 배를 묶어두었다는 고리봉과 함께 지리산 깊은 산속에 전해지는 배 전설이 깃든 지명이기도 하다.

 

▲ 5월 지리산 초록걸음

배너미재를 넘으면 천왕봉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자태를 드리우고 있는 장항마을 노루목 당산 소나무를 만나게 되는데 수령이 400년 정도로 지금도 마을 주민들이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장항이란 지명은 산세가 노루의 목을 닮은 형국이라 노루 장(獐)자를 쓰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여기서부터는 행정구역상으로 남원시 산내면에 속하는데, 천년고찰 실상사와 중고 통합형 대안학교인 실상사작은학교가 자리하고 있는 산내면은 지리산 수많은 마을 중에서도 가장 활기차고 젊은 마을이란 게 필자의 생각이다.

 

▲ 5월 지리산 초록걸음

노루목을 지나 서진암으로 가는 길가에는 특이하게도 앵두나무들이 가로수로 심어져 있었는데 아직은 앵두가 익지 않아 그 새콤한 앵두맛을 느낄 수 없었다. 서진암 입구에서 상황마을로 가는 길가에는 제법 많은 펜션과 민박집 그리고 둘레꾼들이 목을 축이고 요기를 할 수 있는 작은 가게들이 여럿 있었는데, 성수기가 아니어서인지 관리가 제대로 되질 않아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했다.

 

▲ 모가 심겨진 밭 주변을 걷고 있는 사람들

하지만 상황마을에서 바라본 다랭이 논들은 대부분 모내기가 끝나서 가지런히 도열한 연초록 어린 모들이 길동무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 다랭이 논들을 보면서 벼농사의 공익적 가치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식량주권은 말할 것도 없고 산소 공장에 저수지의 역할 그리고 경관적 순기능을 고려한다면 앞으로도 계속 그 논들이 유지되어야 할 텐데, 경제성 때문인지 예전에 비해 하우스로 대체된 곳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 논들이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 농민들은 농민수당을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아무튼 이 아름다운 다랭이 논들을 지켜내는 것도 쉽지만은 않겠다는 걱정을 하면서 논두렁길을 걸었다.

 

▲ 다랭이 논

원래 지리산 둘레길 3코스는 상황마을을 지나 전북과 경남의 경계가 되는 등구재를 넘어 금계마을까지인데 쉬엄쉬엄 느릿느릿 걸으며 지리산을 음미하는 초록걸음인지라 상황마을에서 그 걸음을 마무리하고 진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봄 가뭄 끝에 만난 봄비와 함께 걸었던 5월의 초록걸음, 형형색색의 비옷과 우산을 쓰고 걷는 길동무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 길동무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름다운 꽃이란 생각을 했다.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을 수 있는 비 오는 날의 둘레길을 걸어보시길, 독자들에게 ‘강추’하면서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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