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10여년 전에 확인, 2010년, 2015년 해당 사진 실린 책 출간되기도

진주성 촉석루 동쪽에 익루(부속 누각)가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 사진이 또 한 번 거론되고 있다. <경남도민일보>가 28일 ‘진주 촉석루 익루 사진으로 첫 확인’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하면서다. 하지만 해당 사진이 첫 확인됐다는 이 기사의 내용은 ‘오보’다.

사진은 이미 10여 년 전 출판물 등을 통해 지역사회에 알려졌다. 2010년 이 사진을 실은 고토 분지로의 저서 <조선기행록>이 손일 전 경상대 교수의 번역으로 출판됐고, 2015년에는 김준형 경상대 교수가 자신의 저서 <진주성 이야기>에 이 사진을 차용했다. 경남일보는 2017년 그들의 기사에 이 사진을 싣기도 했다.

 

▲ <경남도민일보>가 처음으로 확인됐다고 주장한 진주 촉석루 익루사진은 2010년 손일 전 경상대 교수가 번역 출판한 고토 분지로의 ‘조선기행록’(오른쪽)과 2015년 김준형 경상대 교수의 저서 ‘진주성 이야기’에도 실려 있다(왼쪽).

사진은 1901년 1월~2월 사이 찍힌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은 촉석루 동측에 있던 부속누각 능허당(함옥헌)의 존재를 입증하고 있다. 능허당은 본루인 촉석루 주위에 있던 4개의 익루(부속누각) 가운데 하나다.

고지도와 여러 문헌들에 따르면 촉석루 주위에는 본루인 촉석루 외에 4개의 익루(부속누각)가 존재했다. 촉석루 서쪽에 위치한 쌍청당과 임경헌(서각), 동쪽에 위치한 능허당(동각), 청심헌이다. 능허당은 17세기 함옥헌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하강진 동서대 교수의 논문 <진주 촉석루 제영시의 제재적 성격(2008)>은 임진왜란 당시 이들 4개 누각이 모두 소실됐고, 4개 누각 가운데 2개의 누각(능허당과 청심헌)은 이후 복구됐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청심헌은 몇 차례 화재가 나며 1757년 사라졌고, 함옥헌(능허당)은 1906년 일본인에 의해 사라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준형 경상대 교수도 <진주성 이야기(2015)>에서 “청심헌은 임진왜란 후 부임한 이수일에 의해 다시 세워졌고, 1623년 화재로 불탔지만 병사 이응해와 신경유 등에 의해 다시 지어졌다. <여지도서>에 ‘청심헌이 지금은 폐해졌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8세기 후반 (청심헌이) 사라진 것 같다”고 기록하고 있다. 함옥헌에 대해서는 1618년 병사 남이흥이 규모를 키워 중건했다고 적시하고 있다.

청심헌이 사라지며 오랜기간 촉석루 옆을 홀로 지킨 함옥헌은 1901년에서 1907년 사이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하강진 교수는 논문에서 “1906년 일본인에 의해 함옥헌이 사라졌다”고 주장했으며, 코베이 경매 사이트에 올라온 1907년 무렵의 촉석루 사진에도 함옥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 <경남도민일보>가 처음으로 확인됐다고 주장한 진주 촉석루 익루사진은 2017년 경남일보 기사에 실리기도 했다 (사진 = 경남일보 누리집 갈무리)

조현근 경남시민문화네트워크 사무국장은 “하강진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밀양부사 김주가 진주성에 사람을 보내 촉석루를 견학한 뒤 영남루를 지었다는 기록이 나온다”며 “현재 촉석루에는 익루가 없지만, 영남루에는 익루가 있다. 영남루는 옛 촉석루를 참고한 것이라는 점이 이 사진을 통해 증명된다”고 말했다.

한편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진주성 고지도, 서울대학교 규장각이 소장하고 있는 진주성 고지도 족자 등을 보면 촉석루 옆에 작은 부속 누각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고지도에서도 촉석루 부속 누각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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