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들

언어학개론이 ‘개콘’으로 바뀌어 요즘 난무하고 있다. A라고 쓰고 B라고 읽는 것은 버얼써 지나간 얘기이다. A라고 쓰면 A가 되고 만다. 무서운 세상이다. "사랑한다"가 "사랑한다"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이게 무슨 꿍꿍이지?“라고 읽히면 세상은 복잡해지는 법. 그 역(逆)도 성립한다. ”육시(戮尸)를 할 놈!“ 했는데 상대가 좋아서 헤벌레 웃으면 발화자가 헷갈려서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은 물론 그 다음 행동반경조차 애매해진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요즘 세상이 그렇다.

’개콘‘은 최근 그렇게 일반화되었다. 문제는 한 줌도 안 되는 일부 무리들이 이를 ’개콘‘으로 웃어넘기지 않고 ”속이 뻥 뚫린다.“며 오랜만(?)에 기꺼워하는 데 있다. 이른 바 ’애국운동‘을 하는 양반들이다. 그 한 줌도 안 되는 무리들이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역사를 바꾸는 불쏘시개 역할을 할 수도 있고 설령 바꾸는 데까지는 안 가더라도 역사의 수레바퀴에 당랑거철(螳螂拒轍)은 할 수 있다는 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궁극적으로 역사가 진전하는 것은 확실하겠지만 잠시 걸리적거리며 쓰잘 데 없이 감정을 소모하게 하는 게 당랑거철이다. 일단 기분은 나쁘다. 생각해 보라. 갈 길이 바쁜데 갑자기 사마귀가 나타나서 수레바퀴살에 연두색을 덕지덕지 살점과 함께 묻히면 당신은 흔쾌하겠는가.

▲ 박흥준 상임고문

뉘앙스는 ‘언어학개콘’이 세상을 한바탕 휩쓴 지 한참은 지나야 발생한다. ‘개콘’에 동원된 여러 언어가 한 10여초 후에 생각해 보니 퀴퀴한 뉘앙스를 풍기는 것이다. 뉘앙스는 하지만 애매하게 연기를 피워서 너 나 할 것 없이 기연가미연가 하게 된다. 뒤늦게라도 그 본질을 알아채야 하는데 ‘개콘’을 신봉하는 자들도 나름은 공부한 놈들이고 어느 정도까지는 똑똑해서 깜빡 속게 만드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다. 따라서 본질을 알아채는 데 시간이 걸린다. 이들이 더 지혜로운 놈들일 수도 있다. 언어를 희롱하는 그 놈들은 악마의 자손들이다. 성경에도 나와 있다. 악마의 자손들이 더 지혜롭다고. 그래서 모두들 뒤늦게 알고 땅을 치며 후회한다. 후회해 봐야 소용없다. 내년 선거는 버얼써 끝났으므로. 버스는 떠났으므로. 역사는 또 한 번 뒤로 미뤄진다. 우리는 또 한 번 어려워해야 한다.

기표와 기의가 일치해야만 언어는 생명을 얻는다.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다. 약속이 어그러질 때 세상은 어지러워진다. 도무지 믿을 수 없게 되고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게 된다. 어그러진 약속은 말을 혼탁하게 한다. 세상이 아비규환(阿鼻叫喚)이 되는 것은 따라서 시간문제이다. 지금 그런 조짐이 보인다. 민주가 독재로 호칭되는 순간이 그 시작점이다. 보수가 좌파로 불리는 것과 동시에 좌파는 세상에 보이지 않게 된다. 그들이 사회주의를 얘기하면 진짜 사회주의자들은 설 땅을 잃고 사라지게 된다. 카오스가 코스모스를 대체한다. 바로 지금이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정명(正名)이 요즘도 운위되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지만 오로지 이러한 까닭이다.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한다. 아직도 말을 바로 세우지 못 하고 이름을 바로 짓지 못 하고 말을 부려 쓰는 데 실패하고 있으니. 그러고 보니 인류의 위대한 스승 공자 당대에도 말이 어지러웠다는 얘기가 되는데 말을 바로세우는 게 그만큼 어렵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말이 바로 서야 세상이 바로 선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 라는 표현이나 명실상부(名實相符) 등등의 문자는 모두 공자의 정명사상에 뿌리를 둔 가지이다. 오랜 세월 말을 바로 세우지 못 하면 결국 지쳐서 말을 포기하게 된다. 바로세워야 할 말들이 나를 힘들게 하고 나를 힘들게 하는 무리들이 드디어 승기(勝機)를 잡는다. 그 결과는?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 이런 탄식과 함께 수많은 ‘나’들이 묵언수행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후에는 매우 위험한 형국이 펼쳐지게 된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들 가운데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이 바로 이 순간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는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을 보는 잘못을 경계하는 가르침이다. 불립문자를 문구대로만 해석해 “문자를 세우지 말라”로 받아들이면 세상의 진실과 지식은 전달할 방법을 잃게 되고 역사는 결국 수천 년이 지나도 제 자리를 맴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말을 해야 한다. 물론 제대로 된 말이다. 저 엉터리 말들을 물리치는 방법은 피식 웃으며 어이없어 하고 그냥 외면하는 게 아니라 제대로 된 말로 응대하는 일이다. 그래야만 정명에 가까이 갈 수 있고 세상이 드디어 바로 설 수 있다.

‘언어는 곧 인간’이라는 말을 그들은 경시하고 있다. 계산된 경시이다. 청와대를 폭파하자고 중인환시(衆人環視)리에 대놓고 외치는 세상이다. 내란을 선동했는데도 잡혀가기는커녕 하루 이틀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다가 다른 더 거친 망언에 자리를 내 주는데 이번에는 차마 입에 담기조차 힘든 비아냥(달창)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세상 참! “목숨 걸고 지키겠노라”의 목적어는 천민자본주의나 지나간 시절의 독재, 간첩을 자유자재로 만들어내는 공안사회이다. 그런데도 그들의 지지자들에게는 이런 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여진다.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지는 것을 넘어 확대와 증폭의 과정을 거치면서 내년 총선의 모토가 될 판이다. 차라리 "하은주(夏殷周) 시대로 돌아가자"는 외침이라면 나름의 이유와 향기는 있을 터. 그들이 돌아가자는 곳은 그들만의 세상. 착취와 지배와 억압과 배제가 난무하는 흑암(黑暗)의 세상이다. 민주주의가 종언을 고하는 세상이다. 그들의 요즘 언어가 그들의 실체를 증명한다. 천금보다 무거운 언어 어디 없을까. 언어는 곧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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