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어버린 2박3일 결혼기념 여행을 꿈꾸며

‘오늘 품삯 받는다. 퇴근할 때 족발 하나 사오너라. 실상사 앞 한생명에 들러 서하 좋아할 만한 라면도 좀 사고.’ 오후 쉴참을 먹고 아들께 문자를 보냈다. 내가 처한 난감한 상황을 벗어나려면 어떻게든 판을 만들어야 했다. 엊그제 읍내에 나가 자목련과 백목련을 한 그루씩 사와서 심어준 것으로 아내의 켕긴 마음을 풀어주기에는 많이 모자란 듯했다.

 “이번엔 여행은 기대하고 있었는데......” 결혼기념일 저녁이었다. 밥상을 앞에 놓고 아내가 중얼거렸다. “우짜노, 할 수 없지. 일이 그렇게 되어버렸는데.” 내 목소리엔 피곤함과 짜증이 좀 묻어있었다.

▲ 김석봉 농부

올해 결혼기념일엔 여행을 가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한 달을 남겨놓고부터 어디로 갈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도를 펴놓고 그림을 그렸었다. 남원역에서 무궁화호 기차를 타고 논산 강경으로 가서 젓갈박물관을 보고, 거기 근대문화유산도 찾아보고 다시 무궁화호를 타고 목포로 가서 ‘창성장’에서 하룻밤을 잔다. 다음날 우리가 신혼여행에서 올랐던 유달산을 손잡고 올라보고, 땅끝마을로 이동, 노화도 거쳐 보길도 몽돌해변 찰싹거리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민박집에서 하룻밤을 묵는 거야.

아니지. 아내가 이 코스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어. 차라리 더 먼 동해바다를 보러 갈까. 남원역에서 무궁화호 타고 조치원으로 간다. 조치원에서 충북선으로 갈아타고 제천으로 간다. 거기서 태백으로 가는 거야. 다음날 태백에서 탄광박물관 찾아보고 동해바다가 아름답게 펼쳐진 묵호항으로 가는 거지. 다음날 또 무궁화호로 영주로 가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기념사진을 찍자. 다음날 경북선으로 갈아타고 김천에 도착, 아직 가보지 못한 직지사도 가보고, 거창을 지나 지리산으로 들어오면 되겠지.

이번 결혼기념일엔 벼르고 벼르던 2박3일 여행을 꼭 가려고 했었다. 우리 누리집 민박 예약상황판에도 ‘민박 안 됨(여행)’이라고 적어두었었다. 해마다 여행을 계획하지만 벌써 삼 년째 여행 한번 다녀오지 못했다. 올해는 어떻게든 떠나야 한다며 석 달 전부터 맹서를 하고 다짐을 해왔었다.

그런데 일이 틀어져버렸다. 3월에 접어들면서 고사리뿌리 캐는 날일을 나가면서부터였다. 마을 아녀자들 몇몇과 어울려 이웃 마을로 날품을 팔러가는 일이 생겼다. 하루 일당은 십이만 원으로 녹녹치 않은 벌이다. 특별한 고정수입이 없는 나로서는 한 달에 닷새 만이라도 날품을 파는 일이 생기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왔었다.

특히나 2월과 3월은 일 년 가운데 민박손님이 가장 뜸하다. 그야말로 춘궁기인 셈이다. 이런 춘궁기에 일당벌이 날품을 팔 수 있다는 것을 고마워해야할 일이었다. 결혼기념일 당일도 일감이 있었고, 하루걸러 다음날도 일감이 있었다. 그렇게 띄엄띄엄 날품을 나흘이나 팔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흐르다보니 밭일도 쌓여갔다. 이웃들은 여태 감자를 놓지 않는다고 성화였다. 지금껏 거름도 뿌리지 못한 밭을 보노라니 막막하고 기가 찼다. 봄비가 잦아 일할 수 있는 날이 많지도 않은데 날품팔이에 밭일 돌볼 겨를이 없었다. 여행은 까마득한 옛 꿈이 되어버렸고, 하루하루 끙끙대야할 노동만 남은 봄날이었다.

품삯을 받았다. 제법 두툼한 봉투였다. 감자밭 고추밭 밭갈이 트랙터 비용 주고나면 거덜 나겠지만 이 봄을 견디게 해주는 고마운 봉투였다.

아들놈은 와인도 한 병 사고 족발에 매운갈비찜에 순대국까지 사왔다. 그쯤은 차려야 어머니의 서운해 하는 기분이 풀릴 거라고 믿었던 모양이다. 7만 원이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4월에 날 잡아 어디 한번 다녀오지......”
 
“어찌 믿어.” 아내에게 별로 신뢰를 주지 못한 삶이었기에 내 중얼거림은 물컹했고, 아내의 반응은 짧았지만 단단했다. “그래요. 집은 우리가 봐 줄 테니까 날 잡아서 한번 다녀오세요.” 보름이가 거들고 나섰지만 아내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4월이 와도 즐거운 여행을 갈 수는 없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었으니까. 속고 포기하고 실망하고 그러면서 건너온 세월이었으니까.

아내와 여행을 다녀온 것은 손으로 꼽을 지경이었다. 사진첩을 뒤적여 봐도 여행을 다닌 사진은 눈에 띄지 않았다. 기껏 찾아낸 것이 아들놈 서너 살 무렵 경주와 구룡포를 다녀온 것이었고, 나머지 사진은 여행이라 할 가치도 없는 것들이었다.

환경운동을 하면서 다닌 생태기행 사진이거나 집회현장에 가서 찍은 사진이 그럴싸하게 사진첩에 꽂혀 여행의 흔적을 보여줄 뿐이었다. 새만금에서 혹은 동강댐 반대운동이 한창일 때 어라연계곡 래프팅하는 사진과 가까운 지리산에 오른 사진이 전부였다. 나는 고참 환경운동가로 여기저기 외국도 나다녔지만 아내와 함께 외국을 가본 적이 없었다. 아니, 아내는 혼자서도 외국여행을 해보지 못했었다.

그렇게 청춘의 세월을 보내고 여기 산골로 들어오고부터 여행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도 아내와 함께 단 둘이 떠나는 여행을 처음으로 해보았었다. 청산도 청보리밭 아름다운 곡선의 돌담길도 걸어보았고, 증도 태평염전 그 아득한 길을 걷기도 했었다. 운주사 천불천탑에 깃든 새 세상에 대한 염원을 새겨본 것도 이 산골에 와서였다.

여기 오고서야 아내의 삶도 좀 한갓지기 시작했다. 주변 젊은 아녀자들과 어울려 계모임 하면서 외국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렇게 기대하는 나들이를 삼 년째 한 번도 나가보지 못한 상태였다. 가야지 가야지하면서도 막상 떠나기가 쉽지 않았고 계획은 틀어져버렸었다.

사방에서 꽃소식이 들려온다. 서른일곱 해 전 신혼여행에서 만난 유달산 진달래는 피었겠지. 툭툭 떨어지던 동백과 샛노랗게 피어나던 유채의 향연은 서른일곱 해 전에 찍힌 청춘남녀의 발자국을 희롱하고 있겠지. 삼등 항해사의 낡은 선실에서 바라보던 바위섬은 거기 그 자리에 기다림으로 남아있겠지. 청어의 비늘처럼 말갛게 반짝이던 그 바다는 여전히 거기 해변으로 몰려와 쌓였겠지.

아내 몰래 다시 지도책을 펴야겠다. 벚꽃이 지기 전에는, 장미가 피기 전에는, 아니 라일락이 피기 전에는, 아니 수국이 만발하기 전에는 반드시 2박3일 여행을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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