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한국당의 무기는 색깔론과 ‘대안없는 반대’뿐인가?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여야 4당이 선거구제 개혁안에 잠정적인 합의안을 마련했다. 여야 5당 원내대표가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논의하겠다고 발표한 지 석 달 만이다. 국회에서 거대 양당이 ‘과다 대표’되고, 소수당 또는 제3당이 ‘과소 대표’됨으로써 민심이 왜곡되는 현상을 시정하겠다고 한 다짐이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게 됐다. 지난 해 6·13 지방선거에서 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이하 자유당)이 전국 기초의회 전체 의석의 90%를 싹쓸이하는 결과가 나오자 소수정당들과 시민단체들을 중심으로 선거제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바른미래당 대표 손학규 등, 당대표들의 잇따른 단식으로 시작된 선거제 개혁안 도출 노력이 일부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이밖에 오랜 기간 자유당의 반대로 국회 통과가 좌절돼온 ‘선거연령 18세 인하안’에도 합의한 것은 뜻깊은 일이다.

여야 4당이 합의한 선거제 개편의 핵심은 현재의 의원 정수 300명을 그대로 둔 채 지역구를 225석으로 줄이고, 비례대표를 75석으로 늘린다는 것이다. 이는 각 정당의 득표율을 100% 연동시켜 비례대표를 뽑자는 시민들의 요구와 거리가 있다. 의원 수를 늘리는 데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국민여론을 감안하면서도 득표율을 최대한 반영할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낸 타협안인 셈이다. 최초로 단식에 들어갔던 바른미래당 대표 손학규도 “차악이라고 할 수 있다”면서 “연동형 비례대표제 선거제 개혁에 고리를 걸자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나마도 물거품이 될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 최용익 전 MBC논설위원

하지만 시작일 뿐이다. 신속처리 안건(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된 선거법 개정안이 본회의에서 최종 처리되기 위해서는 험난한 난관을 돌파해야 한다. 가장 큰 장애물은 국민여론을 들먹이며, 비례대표제 없이 국회의원 정수를 270명으로 축소하는 강수를 던진 자유당이다. 자유당은 선거제 합의를 정의당 등 좌파 정당만 키워주는 정치적 야합이며 공수처 법안과 검경 수사권 조정안도 독재정부의 권한을 강화하는 법안이라면서 막아섰다. 여야 4당이 선거법 등의 패스트트랙 처리에 합의한 뒤 열린 국회의원·당협위원장 비상연석회의에서 자유당의 신임 대표 황교안은 여야 4당 합의를 가리켜 “좌파독재정권 수명연장을 위한 입법 쿠데타”라고 규정하고 “총선 때 국민의 심판이 두려운 나머지, 소수야당들과 야합해 다음 총선에서 좌파연합 의회를 만들려는 음모”라고 비난했다. 야 3당을 ‘소수좌파야당’이라고 지칭하며 “애국 우파를 탄압하는 홍위병 역할을 하고 있다”고도 주장했다.

참으로 무책임하며 후안무치한 대응이 아닐 수 없다. 자유당은 선거제 개혁안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는 동안 자기 당의 안조차 내놓지 않은 채 오불관언으로 일관했다. 2020년 총선을 위해 선거제도와 선거구를 확정해야 할 법정 시한이 다가옴에 따라 선거제도 개혁 논의가 활발해졌는데도 자유당은 청와대가 임명한 중앙선관위 상임위원에 반대한다는 등의 이유로 2월 국회를 보이콧했다. 이렇게 되니 제 1야당을 뺀 나머지 여야 4당이라도 선거법 개혁안 등을 패스트트랙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자유당은 다시 반발하고 나섰다. 국회의원직을 총사퇴하겠다고 엄포를 쏟아내더니, 급기야 비례대표 자체를 폐지하는 안을 제시한 것이다. ‘반대를 위한 반대’를 위해 당위도 실현가능성도 없는 황당한 안을 들이미는 행태라는 비판이 쏟아진 것은 당연하다. 그러다가 막상 자당을 뺀 나머지 정당들이 함께 뜻을 모으자 뒤늦게 “좌파독재”니, “좌파연합의회”니 하면서 뻗대고 있는 것이다. 초등학생도 납득하기 힘든 낯 뜨거운 짓거리가 아닐 수 없다. 결국은 ‘승자독식’의 현행 제도를 고수함으로써 기득권을 놓지 않겠다는 뜻 이외에 무엇인가?

“(이번 개편안의) 핵심은 정의당을 교섭단체로 만들어주는 것”이며 “바른미래당과 민주평화당이 정당의 존속이 어려운 상황에서 거래를 했다”고 야 3당을 모욕한 원내대표 나경원은 ‘선거 연령 18세 인하’ 합의를 가리켜 “고등학교 교실에 이념이 들어가고 정치가 들어간다. 좌파 교육감들이 장악했는데 불 보듯 뻔하다”고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이 말에는 청소년들에 대한 나경원, 나아가 극우보수정당인 자유당의 뿌리깊은 편견이 깔려있다.

지난 2016년 박근혜 탄핵 정국에서 촛불을 들고 광장을 메웠던 청소년들의 존재는 ‘선거권 연령 인하’라는 이슈를 부각시켰다. 이듬 해 1월, 만 18세로의 선거권 연령 하향 법안은 이를 관할하는 국회 안전행정위원회의 법안심사소위를 통과했다. 특이한 것은 새누리당(현 자유당의 전신) 소속 국회의원 강석호도 “18세로 낮추는 것은 세계적 추세”라면서 만장일치 결정에 함께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 뒤 안행위에서는 새누리당의 반대로 안건이 부결됐다. 법안심사소위에서 통과된 법안은 통상적으로 무난하게 통과되었기 때문에 당시 안건 부결은 이변이라고 평가됐다.

작년 10월 새롭게 출범한 국회 정치개혁특위에서도 선거권 연령 하향 안건은 자유당의 반대로 통과되지 못하고 있었다. 자유당이 내세운 논리는 ‘만 18세 이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도록 입학연령과 졸업연령을 당기는 학제개편’을 하고 난 뒤에야 선거권 연령 하향에 동의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고등학생들은 정치에 참여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덧붙여졌다.

자유당의 주장은 극우보수 정당의 낡고 케케묵은 논리에 불과하다. 수많은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고등학생을 포함한 청소년들이 정치 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다. 자유당은 심지어 선거권 연령 기준이 18세 이하인 나라의 청소년들은 한국보다 고등학교를 일찍 졸업한다면서 ‘거짓 소문’을 퍼뜨리기도 했다. 이렇게 청소년들이 ‘꼰대 짓’하는 자당에 표를 줄 리 없다는 사실을 잘 아는 자유당이 솔직하지 못하게 학제개편을 조건으로 내걸었으니 ‘겉다르고 속다르다’는 비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미 선거권 연령이 만 18세부터인 미국과 프랑스 등에서는 만 16세로 선거연령을 낮추자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기성세대가 일방적으로 규칙을 정하면, 젊은 세대는 그 룰에 따라 기성세대가 원하는 대로 주조되기만을 바라는 방식이 더 이상 옳지 않으며,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청소년들은 자신들이 서구의 청소년들에 비해 무엇이 모자라거나 뒤떨어지길래 그들보다 늦은 19세가 되어야 선거권을 가질 수 있는 건지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도 자유당의 ‘선거권 연령 하향’ 반대 주장은 반민주주의적이며, 시대착오적인 구습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

그렇지 않아도 나경원은 한국사연구회와 민족문제연구소 등 29개 역사학회와 단체들로부터 ‘사과와 국회 징계’ 요구를 받은 반민주‧반민족적 발언으로 구설에 올라있다. “해방 후 친일파를 청산하기 위해 만들어진 반민특위가 국민 사이에 분열을 가져왔다”, “지만원의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망언은 다양한 해석 중의 하나다” 등의 최근 발언은 자신이 한국 현대사에 대해 얼마나 무식한가 하는 것도 모르면서 내뱉은 천박한 언행으로 귀결됐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좌파 장기집권을 위한 선거제도”라거나 “공수처는 좌파 망나니 칼춤 기구”라는 등 냉전반공주의에 기반한 대국민 여론전을 대대적으로 펼치고 있는 자유당이 활용하고 있는 무기는 낡아빠진 색깔론과 무조건적인 기득권 옹호 논리다. 작년 지방선거에서의 참패를 뼈저리게 기억하는 자유당은 내년 총선을 앞두고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다급해진 자유당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활로를 모색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선거법 패스트트랙을 둘러싼 자유당과 여야 4당의 대치는 큰 분수령이 될 것이다. 거대 정당인 민주당이나 자유당은 당연히 주도권을 빼앗기 위해 전력투구할 것이고, 소수당인 야 3당도 생존공간을 찾기 위해 나설 것이다.

선거제를 다른 법안들과 연계해 패스트트랙으로 처리하는 것이 ‘최선’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특정 지역과 특정 계층의 기득권 유지를 목표로, 의석을 지키기 위해 대의를 내팽개친 자유당과의 타협은 ‘최악’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여야 4당이 애써 합의한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현시점에서는 거대 양당의 극한 대결과 지역주의를 완화시키고 비교적 민심이 정확하게 반영되는 ‘차선’ 혹은 ‘차악’의 선거제도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 제도의 정착을 통해 시대착오적이고 반역사적이며 한국사회를 이끌고 갈 젊은 세대를 배려하지 않는 정당은 현실정치의 장에서 퇴출되기를 기대해본다.

저작권자 © 단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