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인의 중딩관찰기 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문을 다시 열고 나오는 사람이 되길 바라며 재인 초보엄마l승인2019.03.11l수정2019.03.11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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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사랑해’ 가끔 아들에게 편지를 쓸 때마다 마지막에 적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말이다. 솔직히 나는 아들을 ‘언제나’ 사랑하는 것 같진 않다. 특히 아들이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거나 주변을 배려하지 않고 행동할 때, 해야 할 일을 미룰 때, 내 속에서는 불기둥이 솟구친다. 흔히 사랑에 빠지면 눈이 먼다고 하지만 화가 나도 마찬가지 아닐까. 분노의 화염 방사기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오는 순간, 사랑은 이미 잿더미가 된다.

아들이 방문을 꽝 닫고 들어갔다. 청포도 때문이었다. 마트에서 산 청포도가 3알 남았는데 그것을 10살 여동생이 혼자 다 먹었다는 이유로. 딸아이가 청포도를 먹을 때 나는 그 앞에 앉아있었다. 어린 입술이 오물오물 청포도를 삼키는데 마치 아기 새를 보는 기분이었다. 귀염덩어리. 이제 딸아이는 쓴 한약도 중간에 멈추지 않고 한 번에 삼킬 수 있었다. 오만상을 찡그리면서도 다 마신 컵을 내게 보여주었다. 나는 청포도를 입에 쏙 넣어주며 우리 강아지 다 컸다고 칭찬했다. 그 순간, 갑자기 아들이 화를 내고 들어간 것이다. 왜 자기한테는 하나도 남겨주지 않느냐며.

▲ 재인 초보엄마

나는 한동안 방문을 노려보았다. 어이가 없어서 정말. 눈에서 레이저가 나왔다. 이대로 계속 쏘아대면 문을 뚫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포도 3알 먹은 걸로 대체 왜 그러냐고, 한약을 마셔 달달한 게 필요했다고, 뒤에서 대포소리를 확 집어던졌다. 그러나 아들의 방문은 끄떡도 없었다. 어쩌면 녀석의 무기는 저 방문이었나. 그래서 방탄장치를 미리 해둔 건가.

살다보면 누구나 다투고 갈등이 생길 수 있지만 최근 아들과는 그런 상황이 너무 자주 반복된다는 것이 문제였다. 어제 아침에는 지갑이 말썽이었다. 아이들 등교와 부부의 출근준비로 바쁜 아침, 허둥지둥 서두르다 아차 싶었다. 오후에 아들이 혼자 병원갈 일이 있는데 내가 돈을 줬었나? 하마터면 빈손으로 보낼 뻔 했다. “아들, 지갑!” 그런데 지갑 상태가 엉망이었다. 똑딱이 단추도 떨어지고 천도 벗겨져서 너덜너덜. 여태 이런 걸 들고 다녔구나. 진작 말을 하지. 다음에 하나 사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서둘러 옷을 챙겨 입었다. 그때 아들이 짜증을 내며 투덜거렸다. “저번부터 계속 지갑 떨어졌다고 얘기했잖아요, 사야 된다고~” 어? 뭐라고?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일단 아들의 지갑 얘기를 들은 기억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저토록 짜증을 부리다니, 이 바쁜 아침에! 벌컥 화가 올라왔다. 몇 마디 쏘아붙이는 말을 남기고 현관문을 세게 닫고 나왔다.

그날은 종일 아들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다녔다. 되짚어보니 아들과의 갈등 상황마다 어떤 패턴이 보였다. 나는 수시로 바쁜 편이었고, 아들의 질투 어린 눈빛이나 스쳐가는 말 한마디를 자주 놓쳐왔으며, 그런 일들이 쌓이면 부딪히게 된다는 것. 그때마다 주로 문을 닫는 행동으로 화를 표출한다는 것이 우리 둘의 공통점이었다. 집에 문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그러나 모든 문들이 서로 연동되는 시스템. 방문이든 현관문이든 한번 닫힐 때마다 마음의 문도 자동으로 잠겼다. 혹시 나의 너그럽지 못한 언행이 아들의 마음을 잠그는 열쇠가 되었던 건 아닐까.

퇴근하면서 문구점에 들러 학생용 지갑을 골랐다. 썩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마트에도 가봤지만 색이 너무 화려해서 망설여졌다. 알록달록한 건 유치하다고 싫어할 텐데. 그냥 갈까 하다가 세 번째 가게에서 아들이 좋아할만한 디자인을 발견했다. 아무런 장식 없이 깔끔한 검정색. 뒤에 지퍼도 달려있어서 실용성을 갖춘 지갑이었다. 만 원짜리 한 장과 함께 미리 써둔 편지도 같이 넣었다. 마지막은 역시 ‘언제나 사랑해’로 끝나는 편지. 이번엔 거짓말이 아니었다. 중간에 생략된 말이 있을 뿐. ‘언제나 화가 나면 문을 닫고 들어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문을 다시 열고 나오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엄마도 노력할게. 사랑한다, 아들!’


재인 초보엄마  lita2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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