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원 칼럼] 라면에서 혼밥까지, 자존감으로 쓰는 해피엔딩 스토리

"자존감을 스스로 지킬 줄 아는 해피엔딩 스토리를 바란다" 이장원 자유기고가l승인2019.03.04l수정2019.03.04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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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놀랍고 참담한 어떤 기사를 보며 ‘라면’을 소재로 한 이런 세태 풍자 글이 떠올랐다.

“아빠가 라면을 끓이면 자상한 아빠

엄마가 라면을 끓이면 나쁜 엄마

아들이 라면을 먹으면 불쌍한 내 아들

딸이 라면을 먹으면 게으른 딸”

경쾌한 비유로 가부장 사회의 풍경을 압축적으로 대변하고 있는 ‘라면 4행 시(?)’를 떠올리게 한 것은 2월 14일, 진선미 여성가족부(이하 여가부) 장관이 남성 1인 가구 간담회에 참석해 3040 세대 1인 가구 남성들의 현실적인 고충을 들었다는 기사였다.

기사에 따르면 그날 간담회 자리에서 1인 가구 남성들이 털어놓은 고충들은 다음과 같다.

“혼밥 눈치 보이고 육체적 외로움 해소 못 해”

“원치 않는 이혼을 했는데 남자는 특히 생리작용이 있어서 외로움이 주기적으로 계속 자극이 된다.”

“산행에 모이는 남자 99%는 여자 때문에 오는 것”

“남녀가 만날 수 있는 건전한 자리들이 확보됐으면 좋겠다.”

아니, 정말 이런 말들이 사석에서 주고받은 농담이 아니라 여가부가 기획한 남성 1인 가구 정책 개발 간담회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인가. 장관이 저런 말들을 진지하게 들어주고, 국가가 나서서 저런 고충들을 해결해 줄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는 건가. 2019년이란 이 시대에! 정책 개발 간담회에서?

만일 여성 1인 가구의 간담회가 열렸다면 어떤 얘기들이 나왔을까 생각해 보자.

살인, 강간, 강도, 성범죄 등 생명을 위협하는 범죄에 쉽게 노출되어 있는 두려움, 불법 촬영이나 스토킹, 불법 침입 등으로부터 안전한 곳이 없다는 불안감, 직장에서의 임금 차별과 성차별, 혼자 떠맡고 있는 육아의 어려움, 이혼 후 경력 단절 여성의 생계 문제, 이혼 후 전남편의 폭력 문제 등 기본적인 생존의 위험과 절박한 생활의 어려움을 쏟아 내지 않았을까.

 

▲ 이장원 자유기고가

이에 비하면 ‘육체적 외로움’이나 ‘이혼으로 인한 자존감 상실’, ‘건전하게 이성을 만날 장소가 필요하다’는 남성 1인 가구의 고충 호소는 얼마나 한가하고 배부른 타령인지! 남성 1인 가구가 자존감을 잃었노라고 징징거릴 때 여성 1인 가구는 생명을 잃지 않고 살아남으려고 절박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말이다.

이혼한 남성 1인 가구가 주거, 건강, 안전에 문제가 있어서 복지 취약 계층이 되나? 우리 사회에서 신체적 건강도, 경제적 능력도 가장 강한 30-40대 남성이 이혼으로 자존감이 낮다는 근거가 무엇인가? 이혼 후 외로움도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는 건가? 혼자 사는 남자들은 요리를 할 줄 모르니 정부에서 요리 클래스라도 열어 줘야 한다는 건가?

가부장의 자리에서 이탈한, 돌봄 노동의 의무에서 벗어나 있는, 그러니까 누군가를 돌보느라 생의 기력을 탈탈 소진하지 않아도 되는, 젊고 신체 건강한 자들이 자신의 외로움이나 심심함까지 국가와 사회가 책임져야 한다고 징징대는 꼴을 여가부의 정책 간담회라는 공적 영역의 장을 통해 보는 심정은 한없이 참담했다. 이 남자들은 어쩌다 이렇게 졸렬하고 뻔뻔하고 미성숙한 채 어른이 되었을까. 우리 사회는 어쩌다 남자들을 ‘혼밥도 제대로 못 먹는’ 나약하고 찌질하고 변변치 못한 존재로 길러 냈는가.

한국여성민우회 관계자는 중년 남성들의 고독사가 높은 이유 가운데 하나로 그동안 가사와 돌봄을 어머니나 아내 등 여성에게 의존해 왔던 데에 있다고 말했다. 때문에 남성들은 홀로 된 뒤에 스스로 돌봄이 취약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처량하게 혼자 라면 먹는 남자’

가난이나 가족 내 소외 등 남성의 불행을 말하고자 할 때 항상 등장하는 매우 게으르고 상투적인 이미지인데, 여성의 경우에는 혼자 라면 먹는 시간을 평온한 일상의 한 풍경으로 감사하게 여길 정도로 안전과 생명의 문제에 늘 위태롭게 직결돼 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혼자 라면 먹는 남자의 자존감을 걱정해 주고 애처롭고 불쌍하게 생각해 챙겨 주려고 한다.

혼자서는 밥 못 차려먹는 독거 남성을 이제 와서 어떻게 하냐고 말하는 이들도 있던데, 그 남자들이 식생활도 해결 못하는 채로 반백년을 훌쩍 넘게 생존하기까지 도대체 몇 명 여자의 인생을 갈아 넣어야 했을지 그게 화나고 안타까울 뿐이다. 지금까지 돌봄 노동이 고갈되지 않도록 엄마, 아내, 딸, 며느리가 잘 공급되어 왔는데 그 시스템이 흔들리기 시작했다니까 남자들은 난리가 나는 것이다.

자신이 아닌 누군가의 노동이 집약되어 있으나 그걸 알 필요도 알려는 의지도 없이 제대로 차려진 밥상을 받아먹고 살아 온 사람 입장에서야 혼밥이 그토록 서럽고 서글픈 것인 모양이다.

평생 돌봄 노동을 제공하던 엄마가 늙거나 죽으면, 또는 가사노동을 전적으로 떠맡아 해주던 부인과 이혼하고 나면, 홀로 된 남자가 집밥 제대로 못 먹고 더러운 옷 입고 다닐까봐, 돌봄 노동이 끊어질까봐 초조해 하고 불안해하는 마음들.

남자 한 사람 부양하려면 여자 몇 명의 인생을 통째로 갈아 넣어야 하는데, 그렇게 부양 받고도 결국 자기 혼자 밥도 못 먹는 영영 덜 자란 나약한 남자들로 남고 마는 새드엔딩 스토리.

이젠 너무도 오래 되풀이해 온 이 스토리의 엔딩이 달라지기를 바란다.

언제든 자신의 라면은 손수 끓여 먹을 줄 아는, 혼자 먹는 밥의 호젓한 평화를 당당히 즐길 줄 아는, 자신의 외로움과 심심함은 스스로 알아서 해결하는, ‘내 인생은 내가 돌본다’는 마인드로 자신에게 적합한 셀프 맞춤 돌봄 노동을 실천하는, 그리하여 당연하게 자신의 자존감은 스스로가 지켜 내는, 제 나잇값을 하는 의젓하고 성숙한 남자들의 해피엔딩 스토리를 만나고 싶다. 무척 기다려진다. 그건 그들만의 해피엔딩 스토리일 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해피엔딩 스토리가 될 것이므로.


이장원 자유기고가  winenboo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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