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만의 세계를 지지하고 존중하며

깜빡이는 커서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아들의 프라이버시를 지킬 것인가, 원고 약속을 지킬 것인가. 내 안에서 천사와 악마가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알고 보면 별거 아니야, 그게 뭐 대수라고’ ‘그래도 아들이 나중에 알면 기분 나빠 하지 않을까?’ ‘넌 그 소심증이 문제야. 침소봉대가 어째 갈수록 더 커지냐. 겨우 티끌 같은 문제라니까.’ ‘티끌? 요즘 미세먼지가 암보다 무섭다는 거 몰라? 가뜩이나 예민한 나인데~’ ‘그래서 어쩌라고, 커서는 이미 저만큼 가 있는데!’

겨울방학동안 아들에게 두 가지 큰 일이 있었다. 하나는 그동안 다니던 학원을 끊은 것. 지난 2년간 아들은 학교 마치면 칼같이 도착하는 노란 버스를 타고 가서 학원 수업을 들었다. 학교 공부는 안 해도 학원 숙제는 졸린 눈을 비벼가며 끝까지 하던 녀석. 그 숙제만 마치면 공부를 다 한 것처럼 생각했다. 나도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2년 만에 알았다. 그저 기계적으로 할당량을 채우는 숙제는 공부가 아니라는 걸. 적어도 아들의 경우엔 그랬다.

▲ 재인 초보엄마

그러나 막상 학원 수강을 중단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학습 의지가 바닥인 중딩 아들을 키우는 소심증 환자 입장에서 그것은 밤잠을 반납할 중대 사안이었다. 학원 없이 공부를 어떻게 하나. 더구나 맞벌이 엄마가, 학원 아니면 교육 정보를 어디서 듣겠다고. ‘전적으로’ 의지하던 학원의 끈을 놓고 이 막막한 입시지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10년, 20년치 걱정을 사서 하는 내게 아들이 뜻밖에 명쾌한 답을 주었다. “엄마, 나 학원 그만 둘래요. 차별하는 거 같아.” “차별이라고?” 아들이 다니던 학원에서는 여러 학교 학생들이 수업을 같이 들었다. “아니, 딴 학교 애들이 기말고사 쳤을 때는 선생님이 떡볶이에 순대까지 사주셨거든요. 근데 우리 학교 기말고사 친 날은 아무 것도 없었어. 완전 차별! 열나 짜증나!” 순간 정적. 이렇게 단순한 이유로 학원을 그만둘 수도 있나. 곧이어 아들은 그동안 참아왔다는, 비슷한 수준의 사례들을 열거했다. 넘어가자. 어찌 되었건 결론은 모아졌으니까. 다만 원장님께 마지막으로 인사드릴 때, 떡볶이와 순대 이야기는 한 글자도 꺼낼 수 없었다.

한동안 아들은 자유 시간을 만끽했다. 간만에 좀 편안해보였다. 반면에 나는 속이 복작거렸다. 뭐라도 해야 될 거 같은 조바심이 일었다. 일주일쯤 지났을 때 ‘인터넷 강의’ 사이트를 아들에게 보여주었다. 광활한 ‘인강’의 바다 앞에서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허우적거렸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클릭. 때로는 모르는 것도 힘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다음 주, 아들은 포경수술을 받았다. 그것은 올 겨울방학 아들에게 일어난 두 번째 사건이었다.

수술 역시 지난 몇 달동안 내 고민 리스트에 올라있었다. 주변에 또래 아들 키우는 엄마들에게 물어봐도 저마다 말이 달랐다. 남편은 “그럼 한번 시켜볼까”는 쪽이었는데 무엇보다 아들이 적극적이었다. “엄마, 내 친구 A도 하고 B도 하고 우리 반에 엄청 많이 했어요. 나도 이번에 할래요.” 다음 날 아침 8시 30분경, 남편이 근처 비뇨기과 병원에서 대기번호 1번으로 접수 완료. 그 옆에서 다리를 달달 떨며 진료 개시를 기다리던 아들이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카톡을 보내왔다. “엄마, 고래 잡으러 가요. 개떨림.”

남편은 수술 후 사흘 정도만 안정된 자세를 취하면 일상생활이 가능할 거라고 했다. 하지만 아들은 거의 일주일을 중환자마냥 누워 지냈다. 밥도 침대에서 따로 먹었다. 식탁에는 앉을 수가 없다며. 온종일 드러누워서 폰만 보았다. 당연히 인강도 건너뛰었다. 도저히 집중이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 닷새째 되던 날, 퇴근하니 아들이 컴퓨터 게임에 빠져 있었다. “엄마, 친구랑 간만에 게임하는데~ 와, 내가 다 발랐다, 개꿀!” 아픔이라곤 티끌만큼도 없다는 듯 산뜻한 표정. 저렇게 집중할 수 있는 몸이었구나, 충분히. 나는 조용히 배신감을 삼켰다. 내가 미처 알 수 없는 아들만의 세계가 있을 거라고 애써 짐작하면서.

그 사이, 나는 아들의 방문을 함부로 열지 못했다. 대신 남편을 통해 환자의 상태를 전해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했다. 어느새 달이 바뀌었고, 이제 아들은 날아다닌다. 공부는? 겨우 한 달 지난 인강을 슬슬 지겨워하는 눈치다. 이쯤에서 한번 치고 들어가? 간혹 아들의 방안에서 인강 소리가 흘러나오면 나도 모르게 귀가 쫑긋해진다. 공부를 제대로 하는지 마는지, 확인하고픈 마음 굴뚝같지만 그래도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진 말아야지. 어쩌면 아들은 지금 자기만의 계절을 통과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너의 계절이 사철 봄이라면 좋겠지만 봄을 준비하는 겨울도 나쁘지 않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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