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평탑을 보며 장지필을 생각한다"

지중해 연안을 돌며 풍요한 서구 본토의 여유를 핥던 ‘알쓸신잡’ 팀이 느닷없이 ‘진주’로 날아왔고 단연 그것은 지난 연말 시중의 화제였다. 진주성과 여고, 과학관을 훑은 이야기를 게걸스럽게 먹으며 주섬거리던 도립병원 뒤의 ‘식당’도 이야깃거리였고 공룡이나 운석도 새삼 들먹여졌다. 고향의 면면을 TV로 보니 마치 낯선 대처의 군중 틈에서 뜻밖에 만난 피붙이의 그것처럼 왠지 아련하고 코끝 시큰하다. 그런 한편으로 “근데 보일 게 저것밖에 없었나?” 하는 미진한 맘도 든다. 녹화 당시가 유등축제의 와중이었음에도 유등의 ‘이응’도 들먹이지 않음은 또 무슨 연유인지 꺼림칙하기도 했다.

그런 의중을 읽기라도 한 듯 《알쓸신잡 시즌 3》을 끝내면서 편집단계서 제외된 촬영분을 번외로 내보내는데 진주의 ‘형평’이 소개된다. 지난해 예술회관 앞으로 옮긴 ‘형평 탑’이 강 건너 선학산을 배경으로 여유롭게 부각됐다. 유시민이 탑에 새겨진 ‘형평사 주지’를 읽는다.

“공정(公正)은 사회의 근본이고 애정(愛情)은 인류의 본령(本領)이다. 그런고로 아등(我等)은 계급을 타파하고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여 아등도 참다운 인간이 되는 것을 기하는 것은 본사의 주지이다.”

▲ 홍창신 칼럼니스트

유시민의 설명대로 형평운동은 박해받던 천민계급 ‘백정’과 의식 있는 지역의 지식인 등이 뭉쳐 벌인 인권운동이며 진주에서 시작돼 삽시간에 전국으로 번져 막강 조직의 형평사로 발전했다. 세월이 흘러 그 역사적 사실과 의미가 조명됨에 강상호를 대표로 하는 지식인 진영의 행적이나 역할은 익히 알려졌으나 가장 절실했을 것이고 그래서 투쟁의 전위에서 분투했을 당사자인 ‘백정’ 자신의 기록은 거의 없다. 그중 갖은 소설적 상상을 자아내게 하는 인물이 있으니‘장지필’이다.

「의령사람, 메이지대 법학부 3년 중퇴, 형평사 창립멤버이며 초대 총무, 강상호와의 주도권 다툼으로 분화. 1935년까지 백정해방운동에 깊이 관여.」

장지필의 드러난 흔적이다. 1898년생이고 29세에 유학을 갔다는 기록이 보이지만 근거가 명확하지 않고 아귀도 맞지 않는다. 형평사 창립이 1923년인데 역산해보면 그럴 리는 없는 것이다. 재야 역사학자 ‘이이화의 한국사’에 기록된 생년은 1884년이다. 그는 어떻게 백정의 신분으로 일본 유학에 오를 수 있었으며 중도에 학교를 그만둔 이유는 무엇일까. 그와 일본 수평사와는 어떤 관계였을까. 천민의 신분으로 신학문을 접한 그의 심회는 어땠을까 등의 궁금증이 일지만 실증적 자료는 찾을 길이 없다.

 

“우리는 다 같은 사람으로서 지난 모든 불합리한 제도에 희생이 되어 오랫동안 긴 한숨, 짧은 탄식과 비분, 흐느낌 속에서 원통하고 억울한 생활을 하여오던 백정이 아닌가? 우리는 횡포한 강자계급에게 밟히고, 깎이고, 발리며 천대를 받아오던 백정계급이 아닌가?

생각하여보라. 우리는 그 악마와 같은 각색(各色)계급으로부터 무리한 학대를 받을 때마다 호소할 곳도 없이 부자 서로 붙들고, 모녀 서로 껴안아 피눈물이 흐르도록 얼마나 울었는가? 우리는 한 번 분기하여 이 골수에 맺힌 설움을 씻어내고, 선조의 외로운 넋을 풀어드리는 동시에 어여쁜 우리의 자녀로 하여금 오는 세상의 주인공이…….

궐기하라 백정계급아! 꺼리지 마라 백정계급아!“

-『동아일보』 1923년 5월 8일자-

 

저런 격문을 양반 태생인 강상호 천석구 신현수가 썼을 리 없다. 통한을 품은 자만이 쏟을 수 있는 언어다. 장지필 이었으리라.

형평운동을 기념하는 것은 암울한 시절 차별에 저항한 용기 있는 선인들의 정신을 기리자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그 역사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챙기고 들이대 틀어진 ‘오늘’을 바로잡지 못한다면 과연 기념 따위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알쓸신잡’이 되돌아와 비춘 형평 탑을 보며 다시 장지필을 생각한다.

100년이 흐른 오늘 우리 사는 세상에 ‘백정’은 과연 없어졌는가. 탄식과 비분, 흐느낌 속에서 원통하고 억울한 삶을 사는 이 없는 평등 세상이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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