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봉의 산촌일기] 내 삶의 종착역은 멀리 있고, 새 봄은 다가온다.

"내가 맞이할 새로운 봄이 성큼 다가오고 있다" 김석봉 농부l승인2019.02.01l수정2019.02.01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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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에 내려서자 새벽 별자리는 어느새 봄. 이제 곧 아침이 오고, 세상은 새로운 모습을 내 앞에 펼쳐놓겠지. 내년부터 받는 걸로 알고 있던 국민연금을 올해부터 받게 된다는 사실을 엊그제 알았다. 삼월이 생월이니 사월부터 매달 꼬박꼬박 받게 된다. 이 살림살이에 오십만 원은 큰돈이다. 그것도 내년부터 받을 걸로 알고 있었는데 올해부터로 한 해가 당겨졌으니 일 년 동안 공돈처럼 받게 된 셈이다.

“이십 년 된 저 냉장고부터 바꾸자.” 그런 사실을 알고 아내와 맨 처음 나눈 말이 이랬다. 오래 되어 군데군데 칠이 벗겨지고, 웅웅거리는 소리가 귀에 거슬릴 정도로 집안을 울리는 냉장고였다. “무이자 할부로 냉장고 바꾸고, 대여섯 달 모아 화목보일러 바꾸자.” 화목보일러는 외벽으로 물이 샌다. 바가지를 받쳐놓으면 하루 한 바가지씩 찬다. 게다가 물을 공급해주는 기능이 고장 나 매일 아침 한 양동이의 물을 받아 보일러 뚜껑을 열고 부어주어야 한다. 이 일로 화목보일러를 가동하고부터 집을 비울 수가 없었다.

▲ 김석봉 농부

“다음 겨울이 오기 전엔 아래채 마루에 미닫이문을 달자.” 아래채 미닫이문은 지난해 하려던 일이었다. 방바닥은 절절 끓어도 추운 날은 외풍에 코끝이 시렸다. 눈보라가 치면 마루까지 쌓이고, 비바람이 치면 방문 창호지까지 적셔놓기 일쑤였다. 그래서 자구책으로 비닐천막을 쳐놓았는데 민박 손님들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산골살이 십년이 지나자 우리 살림살이도 많이 너덜너덜해졌다. 손볼 곳이 한두 곳이 아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땜질하듯 손보니 집도 흉하게 변했다. 옆벽은 미관상 나무판자를 덧대었지만 보이지 않는 뒷벽은 방한용 스티포롬 조각을 접착제로 붙여놓았다. 여기저기 전등을 끌어내느라 전선도 거미줄처럼 얽히고 설켰다. 마루도 틈이 크게 벌어져 한 짝이 비스듬히 내려앉았다. 흙벽도 온전치 못하여 군데군데 떨어져 나갔고, 문살도 성한 곳이 없다. 무거운 시멘트기와를 얹은 아래채는 지붕도 기운 곳이 많아 시원찮다.

이런 집을 멍하니 바라보노라면 마치 내 인생을 보는 듯하다. 낡고 기울어버린 집, 그런 인생이 우두커니 앉아있는 집. 그러나 어디서부터 손봐야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 집, 그런 모습을 한 인생이 멀뚱멀뚱 바라보는 집.

올해 들면서 내 삶은 이상하리만치 무디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식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무슨 일에든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매일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는 이웃집 사랑방 출입도 뜸해졌고, 텔레비전 뉴스채널도 시큰둥해졌다. 지난 여름 태풍에 부러져 말라가는 나무가 널렸는데도 화목용 나무 한 짐 해오지 않았다.

산촌생태마을 운영을 다시 해보라는 마을사람들 말도 귀찮았다. 경남녹색당 총회도 언제 지나갔는지 모르겠고, 경남작가회의 모임은 지나고 한참 만에 기관지를 우편으로 받은 뒤에야 알았다. 귀농귀촌자들 모꼬지모임도 시들해졌고, 술잔을 드는 날도 많이 줄었다. 어제는 엄천강 소수력발전소문제로 이웃마을에서 주민들 설명회가 있었는데도 그냥 아랫목에 드러누워 있었다.

그리움도 기다림도 잃어버린 삶이었다. 외로움도 쓸쓸함도 잊어버린 삶이었다. 종주먹질을 하거나 가래침을 뱉기도 싫은 삶이었다. 올해 겨울 내 삶은 이렇듯 침잠하고 있었다. 스스로 뺨을 때려보기도 하련만 이제 그러기가 싫었고, 스스로 길을 나서도 보련만 차라리 이렇듯 주저앉는 것이 편했다.

국민연금을 받게 된다니. 나라에서 챙겨주는 복지기금을 받게 된다니. 이십 년 된 저 낡은 냉장고를 바꾸고, 고장 난 화목보일러를 바꿀 수 있는 국민연금을 받게 된다니. 아, 벌써 거저먹고 살 수 있는 연금을 받게 된다니. 일 없이 뒷방에 나앉았어도 충분할 나이를 먹었다니.

‘아버지는 좋겠네. 용돈 걱정 안 해도 되고.’ ‘당신은 좋겠다. 읍내 장에도 눈치 안 보고 가도 되고.’ 내가 맞이할 새로운 봄은 이렇게 다가왔다. 한 시절 그 치열함을 잃어버린 채 이렇게 흐느적거리며 다가왔다. 그 날카로움도, 그 뜨거움도 사위어버린 채 이처럼 눅눅하게 다가왔다. 그 폭풍과 파도와 번개의 나날을 건너 이렇듯 건들건들 찾아와버렸다. 식어버린 국수를 먹고, 간고등어 한 손 사들고, 느지막이 집으로 돌아가는 완행버스를 타는 장날이 보였다.

아니야. 이렇게 살 수만은 없지. 날이 밝으면 다시 집 앞에 서야지. 묵직한 망치를 들고 너덜너덜해진 저 낡은 집 앞에 서야지. 이제 부서진 곳에 판자를 덧붙이거나 무너진 구석을 시멘트로 때우지 않을 거야. 시뻘건 녹물을 페인트칠로 가리지 않을 거야. 어설픈 못질로 얼기설기 역어놓지는 않을 거야. 내 삶의 종착역은 아직 멀리 있고, 새 봄은 다가오니까.


김석봉 농부  ksb@kfem.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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