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대화를 이어주는 밥

방학동안 아들에게 가장 자주 하는 말, 베스트 3를 자체 선정했다. 3위는 “밥 다 먹었니?” 평소에도 행동이 굼뜬 녀석은 방학을 맞아 대놓고 꾸물거린다. 특히 밥상 앞에서 멍 때리기가 특기인데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씩 웃으며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는다. “엄마, 블리자드가 요즘 너무 돈벌이에만 정신이 팔려있는 거 같아요.” 그럴 때 같이 맞장구 칠 수 있는 건덕지라도 있다면 모자간의 대화가 계속 이어질텐데. 아쉽게도 그 분야는 내가 아는 바가 없다. 다음 말을 기다려줄 여유도 없다. 어서 밥 차려주고 일하러 가야한다. 그렇다고 면전에서 빨리 먹으란 소리는 못하고 ‘뭐 더 필요한 거 없는지’ 물어보는 척 하면서 하는 말. 밥 다 먹었니? 하지만 어느새 녀석도 아는 눈치다. 엄마가 재촉하고 있다는 걸. 반찬도 없이 맨밥을 꿀꺽 삼키고는 빈 그릇을 보여준다. “올 클리어!”

2위는 역시나 이거지. “공부는?” 이 말은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는 특징이 있는데 적어놓고 보니 갑자기 GH가 떠오른다. 그녀가 유세도중 테러를 당한 후 깨어나자마자 “대전은요?” 선거 판세부터 챙겼다는데. 나도 관심이 늘 이쪽에 쏠려있다. 아들이 공부를 했는지 어쨌는지. 마치 대통령 순시하듯이 강압적으로 던지는 말에 녀석은 자주 풀죽은 눈빛이 된다. 가끔 ‘우주의 기운’도 동원했음을 고백한다. 아들이 공부하기 싫어하는 기색이 보이면 우주의 에너지를 집중해서 어쩌고 하면서. 이런 된장. 내가 바로 적폐였다. 그나마 공부가 1위가 아니라는 점을 다행으로 여기며 패스.

▲ 재인 초보엄마

그렇다면 대망의 1위는? “동생이랑 싸우지 마!” 녀석은 6살 아래 동생과 눈만 마주치면 툭닥거린다. 어른들의 사랑이 동생에게 티끌만큼이라도 더 가는가 싶어 레이더 풀가동이다. “그래도 니가 오빠니까 봐주라”는 말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나이와 상관없는 본능이란 걸. 이토록 사랑이 고픈 아이에겐 엄마의 무한 애정과 관심이 샘솟듯이 필요한데. 나는 늘 빨리 먹어라, 공부해라, 다그치기나 하고.

내 궁핍한 어휘력을 확인한 결정적인 장면이 있었다. 네 식구가 밥을 먹다가 두 사람이 먼저 일어나고 식탁 앞에 아들과 나, 단둘이 남았다. 사실 나도 일찌감치 밥을 클리어 했지만 녀석을 혼자 두고 일어서기가 좀 그랬다. 말동무라도 해줘야지. 그런데 정작 할 말이 없는, 황당한 상황. 밥 먹는데 공부 얘기는 양심상 못하고. 그러니 더 할 말이 없었다. 무릇 엄마라면 대지와 같은 너른 마음으로 아들을 품어주어야 하지 않나. 사철 비옥한 토양이 식물을 키워내듯 풍성한 대화로 아이의 정서를 풍요롭게 해주어야 한다고, 책에서 달달 읽어왔거늘. 그러나 현실의 나는 말없이 손가락으로 식탁을 톡톡 두드리고만 있었다. 모스부호 치듯이 해독 불능의 암호를 남발하면서.

그러던 어느 날 퇴근길이었다. 천수교 위에서 퍼뜩 생각났다. 집에 밥이 없구나. 다행히 아침에 쌀은 씻어두고 나왔다. 급히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들, 씽크대에 쌀이 있을 거야, 그거 밥솥에 좀 안쳐줄래?” “네? 엄마, 뭘 안쳐요?” 아들은 쌀을 ‘안치다’는 표현을 이해하지 못했다. “쉬운 거야. 쌀을 밥솥에 넣고 물만 부어. 밥솥에 눈금 보이지? 쌀이 4인분이니까 4.5 정도 높이에 맞추면 돼.” 현관문을 열자 구수한 밥 냄새가 퍼져 나왔다. 아들이 처음 한 밥은 질거나 되지 않고 적당히 고슬고슬하게 딱 먹기 좋았다. “우와, 진짜 꿀맛이야. 엄마가 한 거보다 훨씬 맛있네~” 모처럼 칭찬받은 아들은 한껏 고무된 표정이었다. “그까이꺼 뭐, 대충 코드 꽂아서” “아니야, 같은 밥솥이라도 이 맛 내기 어려워” “물 맞추기가 핵심이죠.” “맞아, 물이 중요하지. 옛날에 전기밥솥이 없을 때는 손등 높이로 물을 맞췄대.” “그래요? 어떻게요?” “이거 봐, 이렇게 손바닥을 펴고...” 그날 저녁 우리는 식탁에서 모처럼 찰진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날 이후 아들은 자연스레 밥 당번이 되었다. 우리 부부가 퇴근하기 전에 집에 먼저 도착해서 밥물을 맞추고 취사버튼 누르기. 초밥 장인이 밥물에 공을 들이듯이 아들은 한 국자의 물도 허투루 넣거나 빼지 않았다. 입안에서 알알이 터지는 황홀한 밥맛. 남편과 나는 매번 감탄을 금치 못했다. 간혹 학원 수업이 늦게 마치는 날이면 아들이 전화로 물어왔다. “밥을 못했는데 엄마가 대신 좀 해줄 수 있어요?” 그런 날은 밥맛이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아무래도 손맛이 따로 있나봐. 우리 아들 솜씨를 못 따라가겠어.” 녀석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간다.

덕분에 며칠째 저녁마다 아들이 해준 밥을 잘 먹고 있다. 갓 지은 새 밥을 먹어서 좋고, 공부 말고도 할 말이 생겨서 더 좋고. 허기진 마음까지 채워주는 고마운 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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