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하 선생님의 그 빛나는 생일잔치를 다녀와서..

“돈은 쥐고 있으면 구린내가 나고, 쓰면 향기가 난다” 진주에서 한약방을 해온 김장하 선생님 말씀이다. ‘병자의 돈을 벌어 자신을 위해 써서는 안 된다’는 삶의 철학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다. 진주 살 때 한없는 존경심으로 선생님을 만났었고, 그 삶의 언저리라도 밟으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키웠었다.

진주에서 오래 전부터 함께 환경운동을 했던 사람들의 모임이 한 달에 한번 있는데, 이번 모임은 김장하 선생님 생일축하잔치에서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벌써 팔순인가? 팔순쯤 되니 잔치판을 벌이는 게 아닐까하는 마음으로 진주로 향했다. 지리산 등성에 쌓인 노을이 경호강에 비쳐 아름답게 일렁거렸다.

▲ 김석봉 농부

선생님과의 추억은 특별한 것이 없었다. 해마다 설날이면 몇몇이 모여 한약방으로 세배를 갔었고, 후원주점 티켓이 나오면 그것을 전해드리려 찾아갔었고, 총회가 다가오면 일 년치 회비도 받고 격려사도 요청하기 위해 찾아갔었다. 이런저런 일로 일 년에 대여섯 번은 마주앉았었다.

얼굴을 드러내는 일엔 늘 인색하셨고, 어려운 살림살이를 걱정하는 마음과 필요한 돈을 기부하는 일엔 늘 넉넉하셨다. 술은 한 방울도 않으면서도 후원주점 티켓은 빠짐없이 받아주셨고, 해마다 회비봉투는 건네면서도 총회장에 찾아와 격려사는 한 번도 해주지 않으셨다. 어려워 찾아가는 모든 이를 빈손으로 보내지 않으셨고, 자제분들 결혼식 청첩장은 내지 않으셨다.

나는 환경운동가로 일하면서 활동비를 백만 원 이상 받지 않으려 했다. 활동하고 십년이 지나자 월 일백이십만 원을 받으라고 했다. 이십만 원은 회비로 되돌려 주었다. 그래야 마음이 편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돈을 그다지 모으지 못한 것이 능력이 부족해서인지 선생님의 영향 탓인지 모를 일이다. 진주를 떠나온 뒤로 통 만나질 못했으니 벌써 십년 세월이 흘렀다.

이런저런 추억을 회상하는 사이 버스는 진주에 도착하고, 행사장엔 낯익은 사람들이 붐볐다. 진주에서 사회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은 거의 모였다. 문화예술인들과 교육계, 지역 언론계, 노동운동가들, 시민운동가들이 자리를 꽉 메웠다. 십여 년 만에 반가이 만나는 얼굴도 많았다.

선생님의 일흔여섯 생일이라고 했다. 지난해 뇌경색이 와서 건강을 많이 잃었다고 했다. 목소리도 많이 어둔해졌고, 걸음걸이도 편치 않다고 했다. 건강이 더 나빠지기 전에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자 마련한 자리라 했다. 환갑이나 칠순 팔순과 같은 기념일이 아닌 생일잔치가 오히려 정감이 갔다.

선생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며 몇몇 사람들이 연단으로 나와 선생님과의 추억을 되새겼다. 사학재단을 설립하고 명신고등학교를 개교해 명문사학으로 발전시킨 뒤 국가에 헌납한 사연을 들려주었다. 진주오광대복원,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시민주주신문인 진주신문 창간, 두 청년농민의 죽음과 농민회관에 스며든 선생님의 발자취를 들려주었다. ‘진주가 없었으면 선생님도 없었을 것이고, 선생님이 없었다면 진주도 없었을 것’이라는 말에 공감하는 시간이었다.

오래전 노무현 정부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날도 도움이 필요한 어려운 일이 있어 선생님을 찾아갔었다. 진주에서 사회운동을 한 단체나 개인 치고 선생님의 도움을 받지 않은 이가 없었다. “어찌 될 것 같아? 이산가족상봉은?” 진료를 마친 선생님께서 응접실로 들어오자마자 겉옷을 벗으며 말씀하셨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엔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져야 하는데......” “왜요? 이산가족이 있으셔요?” 나는 그동안 선생님의 가족 이력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다. “큰형님이 북에 계셔. 많이 늙으셨는데 이번에도 상봉신청을 해두었거든. 이번엔 꼭 만나야 하는데......” 선생님의 큰형이 월북을 하게 된 자세한 사연은 뒤에 전해 들었지만 안타까운 가족사를 가진 분이셨다.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 한약사가 되어 진주에 자리 잡기까지 힘든 세월을 사셨다.

그런 세월이 당신을 이 땅의 빛과 소금이게끔 만드셨구나. 그런 힘들고 쓴 세월을 오로지 당신의 세월로 만드셨구나. 생각이 잠시 머무는 사이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이 터졌다. 이런 자리인줄 모르는 상태에서 선생님이 나타나셨다.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표정이 금세 누그러졌다. 약간의 부축을 받으며 연단에 오르셨다. 대중 앞에서 저처럼 연단에 오른 모습을 보여준 것도 처음인 듯했다.

“여생을 더욱 부끄럽지 않게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선생님의 인사말은 짧았으나 또렷했다. 빛나는 생일잔치였다. 이튿날 이른 아침 찜질방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지리산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차창에 기대어 지난밤 선생님 말씀을 생각한다. 내 삶을 생각한다.

통장엔 적으나마 돈이 있고, 밥상은 언제나 그득한데 참 많이 칭얼거리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머지않아 적은 액수나마 국민연금도 받고, 기초노령연금도 받을 건데 쓸데없는 노후 걱정으로 아등바등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때 여기저기 내는 후원금을 줄이려했던 생각이 부끄럽게 다가온다. 지상의 끄트머리 굴뚝에 오른 노동자들이 굶주릴 때 게걸스럽게 먹어치운 그 고봉밥이 부끄럽게 다가온다. 좋은 세상을 바라 많은 사람들이 한뎃잠을 잘 때 내가 차지했던 아랫목 따뜻한 잠자리가 부끄럽게 다가온다. 꽃이 피었다고 밝아질 세상이 아니련만 꽃놀이에 취했던 그 봄날이 부끄럽게 다가온다.

양파면 양파를, 고구마면 고구마를 믿음으로 사주는 사람들. 누추한 우리 집을 찾아와 불편한 기색도 없이 머물고 가는 사람들. 그이들의 도움과 나눔이 주는 따뜻함이 생각난다. 먹이를 챙겨와 마당 길고양이들께 나누어주던 그 아이들 해맑은 얼굴이 떠오른다. 언제나 온정을 잃지 않고 살아야겠다. 여생을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겠다.

김장하 선생님 그 빛나는 생일잔치, 방명록에 나는 이렇게 써두었다.

“우리를 늘 깨어있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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