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세들의 잔치’로 끝난 예산안 밀실‧담합‧졸속 처리

야 3당이 표심을 제대로 반영할 수 있는 선거구제 개편을 요구했을 때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이하 자유당) 등 거대 정당들은 ‘예산안’ 처리가 급하다며 이를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였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새해 예산안은 밀실과 졸속 심사로 얼룩지고, 법정시한을 넘긴 것은 물론이고, 국회선진화법 도입 이후 가장 늦게 처리됐으며, 토목건설부문에 대폭 예산을 늘렸다. 애초 정부안보다 9천 억원 감소된 469조 6천 억원 규모다.

‘복지와 일자리’ 예산은 정부안보다 1조 2천 억원 줄어든 대신 사회간접자본(SOC) 예산이 정부안보다 1조 3천 억원 가량 늘어났다. 전년 대비 SOC 예산이 증가한 것은 4년 만이다. 그 이유는 일자리와 복지에 투입될 예산을 줄여 생긴 몫을 양당의 지도부를 구성하는 ‘실세’ 의원들의 지역구 건설 예산을 챙기는 데 돌려썼기 때문이다.

▲ 최용익 전 MBC논설위원

‘민생과 직결되는’ 예산안 통과가 최우선이라고 주장해왔던 당 지도부는 그러나 자신들의 지역구 예산부터 챙기는데 앞장섰다. 실세 의원들의 예산확보 쟁탈전은 상상을 뛰어넘었다. 지역구 민원 예산을 무더기로 증액하는 것은 기본이고, 정부 예산안에 없던 것을 ‘부대의견’이라는 항목을 새로 만들면서까지 챙겼다.

야 3당을 향해 “국민이 써야 할 예산을 어떻게 선거구제와 연결시킨다는 말이냐”며 비난을 퍼부어 ‘국민의 민생 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우는 것처럼 보였던 민주당 대표 이해찬은 ‘겉다르고 속다르게도’ 자신의 지역구 예산을 정부안보다 253억 원이나 증액시켰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국립세종수목원 예산으로 303억 원이 계획된 원안을, 556억 원으로 두 배 가까이 늘린 것이다. 또 정부 예산안에 없던 국회세종의사당건립기금 10억 원과 세종 산업기술단지 조성비 조로 5억 원을 막판에 추가했다.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김성태도 지역구인 강서을의 서울 지하철 9호선 증차 예산 500억 원을 챙겼다. 예산 심사를 담당한 국회 예산결산특위 의원들도 ‘잔치판’에서 빠지지 않았다. 국회 예결위원장인 자유당 안상수는 해양박물관 건립 예산 16억 원 등 모두 46억 원을 증액했다. 민주당 예결위 간사인 조정식은 지역구 도로 개설 예산에서만 정부안보다 20억 원을 늘렸고, 한국당 간사인 장제원도 지역구 예산에서 80억 원을 더 챙겼다.

이 밖에도 수 십 억에서 수 백 억원에 이르는 ‘쪽지 예산’을 챙긴 의원들이 적지 않다. 매년 밀실 심사에서 남발돼온 것이 ‘쪽지 예산’이지만 올해는 두 개의 거대정당끼리만 예산안을 처리한 탓에 그 정도가 훨씬 더 심했다. 서로 짜고 하는 짬짜미 예산 심사였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역대 최대 규모인 내년 예산은 정부가 낸 470조 5천억 원보다 9천억 원 정도 줄어든 469조 5천억 여 원인데, 이는 야당이 20조 원 대폭 삭감을 예고했던 것에 비하면 거의 줄어든 것이 없다고 봐야 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문제는 졸속 심사에 있다. 석 달 동안 심사 과정을 통해 5조 2천억 원을 삭감했는데, 그 가운데 4조 3천억 원이 심사 마지막 날 살아난 것이다. 부활의 비밀은 실세 의원들이 깎은 예산의 상당 부분을 자신들의 지역구 예산으로 챙겨간 데에 있다. 국회는 9월 3일부터 석 달 넘게 감액 심사만 하는 반면, 증액 심사는 단 하루 동안 회의록도 남지 않는 비공개 소소위에서 이뤄진다. 이렇게 예산 증액이 짧은 시간에 벼락치기로 진행되다 보니 거대 정당과 실세 의원들의 노골적인 나눠 먹기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상임위에서부터 공개적으로 감액 심사와 증액 심사를 동시에 하는 제도적 보완책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밀실 쪽지 예산, 실세 예산 분배논란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녹색당은 예산안 분석 자료를 통해 국회의 예산 편성의 문제점을 비판했다. 먼저 이번 예산안에서 삭감한 민생예산안으로 기초생활수급자 노인들에 대한 월 10만 원 생계비 지원 예산을 비롯해서 장애인 연금 3급 확대 예산, 쌀 변동 직불금 예산, 일자리·청년 예산 등을 열거했다. 이에 반해 도로, 철도, 공항 등 신규 SOC(사회간접자본) 예산은 대폭 증대됐다. 애당초 정부안에는 포함돼 있지 않았던 울릉도 공항 건설 20억 원과 흑산도 공항건설 10억 원도 함께 거론됐다. 자료는 “이해찬 예산, 김성태 예산, 조정식 예산, 장제원 예산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국민 세금은 힘있는 특정 정치인들의 입맛에 따라 배분돼선 안 된다”라고 지적했다.

일자리 창출과 복지 확대를 위해 쓰여야 할 거액의 예산이 거대 양당의 ‘야합’에 의해 이제는 한 물 간 토목건설 사업에 투입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개혁 성향의 학자 189명이 지난 6일 낸 긴급 성명에서 예측한 그대로 흘러가고 있다. 이들 학자들은 “야3당이 선거제도 개혁과 예산안 처리를 연계시키자 민주당은 현 선거제도의 고수에 뜻을 같이하는 자유당과의 거래를 통하여 예산안 통과를 획책하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고 있다. 이른바 ‘반개혁연대’ 혹은 ‘적폐연대’를 도모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해찬은 “국민이 써야 할 예산안을 다루는 것이 선거구제도 개편보다 더 중요하다”고 강변했다. 그것이 소신이라면 이해찬은 경제적 자원을 국가적으로 공정하게 적재적소에 배분했어야 함에도, 민주당과 자유당의 김성태 등 고위 당직자들과 사적으로 나눠먹기를 함으로써 자신의 주장마저도 배반했다. 그러니 ‘야합’이라는 비난을 들어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사실은 이해찬의 주장과 달리 한국 국민에게 선거구제 개혁은 한 해 예산의 증감보다 장기적으로 훨씬 더 큰 영향력과 파괴력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대한민국의 사회‧경제적 약자-비정규직 노동자와 농민, 소상공인, 청년 등-들은 하루하루를 살아가기가 어려운데도 막상 국회 안에 그들을 대표하는 정당과 정치인은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왜냐하면 현재의 선거제도는 두 개의 거대정당에 유리하게 설계돼 있으며 ‘승자독식’ 방식 때문에 당선자를 찍지 않은 나머지 표심은 사표로 버려지고 말기 때문이다. 이것은 민주 국가의 주인인 대다수 시민들이 자신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대표해 줄 국회의원 하나 없이 방치돼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야 3당이 주장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와 같이 약자를 포함한 구성원들과 주요 집단의 정치적 대표성과 민심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좋은 선거제도'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연동형 비례대표제’(일명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는 이미 2012년과 2017년 대선, 그리고 2016년 총선 때의 민주당 공약이었다. 야당시절의 공약이 집권여당이 됐다고 해서 달라진다면 민주당이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을까?

민주당은 판단을 잘 해야 할 것이다. 국민들이 왜 공무원 봉급 인상률에 맞추었다는 1.8%의 국회의원 세비 인상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지, 또 겉으로는 ‘민생을 챙긴다’고 선전하면서도 속으로는 자유당과 야합해 ‘예산 나눠먹기’의 추태를 부린 민주당 대표 이해찬의 이중적인 모습에 어떻게 반응할지를 말이다. 아울러 문재인 대통령은 자신의 공약이기도 했던 선거제도 개혁을 논의하기 위하여 야 3당을 포함한 정당 대표들과의 회동을 조속한 시일 내에 주선할 필요가 있다. 예산안 밀실‧담합‧졸속 처리에 개입됐고, ‘연동형 비례대표제’ 개혁에 대해 소극적, 부정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 이해찬은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으며 지지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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