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서울로 간 사이 아침밥상 앞에서.."

새벽비가 내린다.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가 제법 크게 울린다. 주섬주섬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굵은 빗줄기가 텅 빈 꽃밭을 적신다. 마루에 걸터앉아 비 내리는 어둠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이어폰을 꼈다. 정태춘씨의 노래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와 최백호씨의 노래 ‘하루 종일’을 듣는다. 문득 오래전에 끊어버린 담배를 한 개비만 피웠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서울 안 가?” 며칠 전 밥상머리에서였다. 아내가 나가는 모임이 있는데 매달 그 날이 다가오면 아내가 먼저 챙기곤 했었다. 그 날이 다가와도 언급이 없어 잊고 있나 싶어 내가 먼저 말을 꺼낸 거였다. “응, 안 갈라고.” “아니, 왜?” “셋째 주에도 가야 하는데 그때만 갈라고.”

▲ 김석봉 농부

아내의 정기외출은 한 달에 두 번, 서울 궁중음식연구원으로 가는 거였다. 첫 주는 음식공부를 함께 해온 사람들과의 친목모임이었고, 셋째 주는 음식을 공부하는 학습모임이었다. “그래도 이번 모임은 송년모임이잖아. 바쁜 일도 없고, 여유도 있는데.” “그렇잖아도 작년에 개근했다고 상금까지 받았는데 올해 모임은 잘 안 나온다고 말이 많은가 보더라.”

아내의 목소리가 한껏 밝아졌다. 한 달에 두 번이나 서울나들이를 하는 게 부담스럽고 눈치가 보였는지 첫 주 모임이 다가와도 말을 꺼내지 못한 것 같았다. 내가 먼저 챙겨주는 것에 고마워하는 눈치도 살짝 비쳤다. 월요일 오전 모임이어서 아내는 어제 떠났다.

비가 내리고 큰 추위가 닥칠 거란 예보에 어제는 하루 종일 바빴다. 밭에 남겨둔 속이 덜 찬 배추를 자루에 담아 들였다. 덜 자란 무청도 모두 잘라 들였다. 겨우내 먹을 대파도 뽑아 들였다. 퇴비 덮개도 다시 손질하고, 개울가 공터에 쌓아둔 화목도 더 넓적한 비닐로 다시 덮었다.

집 마루에도 방풍방한용 비닐천막을 둘러 쳤다. 처마 아래 바닥에 푹신한 스티로폼 자리를 깔고, 헤진 이불을 덮어 씌워 노끈으로 묶은 고양이 집도 만들어 주었다. 뒷마당 닭장도 다시 손보고, 꽃밭에 남은 시든 꽃대궁을 잘라내자 이내 어둠이 마당으로 스며들었다. 보일러에 화목 넉넉히 넣어주고 수돗가에서 손을 씻었다. 물이 많이 차가워졌다.

홀로 앉아 저녁밥을 먹었다. 무두부국과 김치와 파김치와 간장을 차리고 김을 구웠다. 단출한 저녁밥상 앞에 홀로 앉아 밥을 먹는데 무슨 까닭에선지 왈칵 슬픔이 북받치는 것이었다. 단출한 밥상에서 홀로 밥을 먹는 이 모습이 오래지않아 내가, 혹은 아내가 맞이하게 될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면서였다. 둘이 살다보면 결국엔 어느 날엔가 이처럼 홀로 남아 단출한 밥상 앞에서 쓸쓸한 저녁을 맞이하게 될 거란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눈언저리가 뜨거워지는 것이었다.

하루 종일 바쁘게 겨울나기를 준비하는 동안 골목엔 이웃 한 사람도 얼씬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밭과 집을 수없이 오가면서도 이웃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아내로부터 걸려온 두 통의 전화와 몇 통의 광고메시지가 하루 종일 내가 만난 세상의 소리 전부였다.

앞뒷집과 옆집들 모두가 홀몸으로 사는 이웃들이었다. 길 건너 옆집은 귀머거리 할머니가 홀로 살고, 그 뒷집은 비었고, 뒷집은 두부박샌댁이 홀로 살고, 앞 두 집은 비었고, 오른쪽 대밭 아래 옆집은 앉은뱅이 할머니 홀로 살고, 그 뒷집은 노샌댁이 홀로 산다.

끝끝내는 모두 홀로 남아 살아간다. 살아가는 이유도 모른 채 살아간다. 목숨이 붙어있어서 살아간다. 살아가기 위해 희멀건 된장국과 김치와 간장으로 밥상을 차리고 앞에 홀로 앉는다. 내일도 모레도 같은 모습일 것이다.

저런 모습으로 살아가지는 않을 거라고 다짐하고 맹세하지만 끝끝내는 저런 모습이어야 할 뿐이다. 젊은 날 가졌을 뜨거운 정과 삶의 구비에서 품었을 한도 무용해지고 오직 흐르는 시간에 허물어지는 몸뚱이를 올려놓아야 한다.

“늙어가면서 왜 서로 멀어지는지 몰라. 늙을수록 더 가까워져야 하는데.” 어제 서울행을 준비하면서 아내가 뜨악하게 말했다. 이따금씩 내는 나의 짜증에 아내의 핀잔도 당찼었다. 짜증도 핀잔도 줄여가며 살아도 잃어버린 애틋함은 영영 되찾을 수 없으련만 나이 들수록 고쳐지지가 않았다. ‘홀로 남을 것을 준비하는 거겠지. ’나는 차마 이 말을 하지 못했다.

날이 훤히 밝아온다. 또 혼자 먹을 아침밥상을 준비해야 한다.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와 ‘하루 종일’을 크게 틀어놓고, 멀건 된장국을 끓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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