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주제 격인 '논개'에 관한 품평에 참섭해야 할 구석이 있다.

그저 번드르르한 말로 입술을 나불거린다고 그런 칭호를 얻을 수 있으랴. 처음엔 유수같이 흐르는 쉼 없는 ‘말빨’에 질려 찬탄 반 조롱 반으로 부른 별호였을 터. 그러나 백기완 방배추 황석영 선생을 ‘조선 3대 구라’라고 일컫고 그게 전설처럼 굳어져 회자하는 것은 그들이 세 가지쯤의 요건을 갖춘 보기 드문 인물들이기에 그랬을 것이다. 그 셋은 꽉 차게 살아온 밀도 높은 인생, 일가를 이룬 지성, 그리고 통 큰 포부와 그걸 이루는 능력의 탁월함이다. 아직은 평가가 이르겠지만 그들이 걸어온 길이 한국 현대사의 한 가닥 굵은 노정이었고 변화의 주요 요소로 작동했음은 모두가 지켜봤던 바다. 그 박식 배짱 유머를 반죽한 막힘없는 구라야말로 가히 국보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명성을 뒤이어 적통을 물려받을 위인이라 일컬어지는 이들이 유홍준 이어령 도올이라는 풍설이 있는바 아직 모두 생존해 있는 쟁쟁한 우리 시대의 보물들이다.

▲ 홍창신 자유기고가

시작부터 화제를 몰아온 ‘알쓸신잡’은 그 유명 짜한 ‘구라’의 반열에 올라서 보려는 입담꾼들이 펼치는 로드 ‘쑈’를 중계하는 TV 프로그램이다. 세 번째 시즌을 아테네에서 시작해 이태리로 독일로 돌아다니며 신화와 철학과 건축과 포도주를 어지럽게 들먹거렸다. 그들이 먹고 마시는 것의 풍요로움과 놀고 떠다니는 여유로움을 마치 다이어트 중 먹방을 보는 심정으로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그들이 별안간 ‘진주’로 온 것이다.

전생이 투영되어 골목골목이 내 살점, 핏줄과 나뉨 없이 이어진 듯 살가운 고향 진주를 타관 사람의 눈으로 들여다보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생경한 느낌이었다. 에니어그램 같은 유형 검사지를 받아들고 전혀 자인하지 못하던 자신의 ‘무엇’에 흠칫하듯 테레비를 들여다봤다.

강남동 245번지 섭천 못가의 역사에서 삼랑진 거쳐 부산 가는 열차를 타고, 목포 가는 밤 기차에 오르고, 해수욕장 가는 삼천포행 기차에 매달리던 시절의 사람으로서 그들이 KTX에서 내린 가좌동의 ‘진주역’부터가 낯설었다. 아. 이제 저기가 관문이로구나.

“니글쿠니 내글쿠지

니안글쿠모 내글쿠나“

유시민의 대학 친구가 썼다는 ‘진주 사투리’를 들으며 이제는 원형이 사라져가는 동네 말을 생각하며 쓴웃음이 난다. 지금은 ‘에나’조차 쓰는 이가 많잖다. ‘에나’는 진주를 빙 둘러싸고 있던 진양군에서조차 거의 쓰지 않던 오롯한 진주 말인데도 말이다.

그들은 색안경을 끼고 촉석루에 오르고 벼랑을 타고 의암을 내려다보고 진주난봉가를 듣고 무너진 동문의 지형을 살피며 처절했던 두 번 전투의 정황을 반추한다. 그리곤 높이 드론을 띄워 부감한 남강 비봉산 촉석루 배건네 대밭의 정경은 평소 느끼던 아름다움에 대한 자부심의 게이지를 더욱 높여주었다.

이 팀은 외지 사람들이 진주 오면 으레 카메라가 따라가는 중앙시장 안 두 군데 비빔밥집을 부러 피한 것 같다. 식상한 걸 피하자는 심산엔 동의하지만, 당최 어딘지 짐작키 어려운 저 집 음식이 진주 식단을 대표할까 미심쩍더니만 모두 맛있다고 쩝쩝거리니 다행으로 여겨졌다. 수소문해보니 서부시장과 중앙시장의 중간쯤에 있는 ‘깐돌이집’이란다. 저집은 본시 ‘국시’ 잘하는 집 아니었던감?

토박이를 자처하면서도 높이 18m에 달하는 공룡이 하루에 3400리터의 방귀를 뀌며 쿵쿵거리고 이 동네를 휘젓고 다녔고 그 화석의 모형을 전시한 과학관이 지근에 있다는 사실과 객지 사람들이 성문 앞에서 사 먹는 ‘운석 빵’ 이란 것이 있다는 사실과 여고 마당에 그리 큰 개잎갈나무가 있다는 사실과 그 곁에 박경리 선생의 시를 새긴 돌팍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좀 창피했다.

그렇지만 그날의 주제 격인 ‘논개’에 관한 품평엔 좀 참섭해야 할 구석이 있다. 논개 이야기의 시작은 ‘어우야담’이며 유일한 역사적 기록이다. 그것도 달랑 몇 줄뿐이니 논란이 있음도 사실이다. 전후 광해군을 수행하며 삼도순안어사 노릇을 하던 유몽인이 “논개에 관해 보고들은 사실을 공문에 명기했어야 할 것을 사적 문집에 담아 진위를 논란케 했으므로 사관으로서의 유몽인은 비겁했다”라고 유시민이 말했다. 재미를 얹어 한 말이니 정색하고 덤벼들 일은 아니지만 이 부분에 관한 김수업 선생의 연구에 기대어 몽인을 변명해 본다. (김수업 저 ‘논개’2001 진주문화연구소)

난리 내내 줄곧 도망만 다닌 비겁한 아비 선조를 대신해 전후 수습에 나섰던 세자 광해가 곡절 끝에 가까스로 왕이 되었다. 광해 4년(1612) 임금의 명으로 임란 때에 목숨을 바친 충신 효자 열녀를 찾아 홍문관에서 〈동국신속삼강행실도〉 17권을 펴내는데 “관기를 충신이나 열녀 부분에 넣을 수 있느냐의 시비가 벌어지고 마침내 불가하다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유몽인은 안타까움을 이렇게 썼다. “.....中略...논개 한 사람뿐이 아니었지만 그들의 이름을 거의 잊어버렸다. 저들 관기는 음탕한 창녀들이라 곧고 맵다(貞烈)고 일컬을 수 없다지만 죽는 것을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여겨......충성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기생의 신분이라 국가 공인 문서에 오를 수 없었다는 기록이다. 실제 나라가 논개의 보훈 사실을 인정하고 보상을 지시한 것은 130년이 지난 1722년 경종 때의 일이다.

논개가 기생이냐 마냐 하는 최경회와 관계된 신분 문제는 사실 누구도 알 수 없다. 작가 두엇만 붙으면 기막힌 서사가 일 같잖게 이뤄지는데 그간 ‘논개’에 침을 바른 이 나라 작가 명색이 무려 몇인가. 누가 옳냐 그르냐의 문제로 우길 것이 아니라 더 다양하게 재해석되고 윤색되어도 좋다 여긴다. 유몽인을 시작으로 ‘논개’에 관련된 갖은 기록과 해석은 김수업 선생님이 제대로 정리해 놓으셨다. 책 마지막에 인용한 만해의 시가 의미심장하다.

그 구라의 후예들이 제안한 ‘논개 영정’ 콘테스트는 꽤 구미가 당기는 흥미로운 제안이니 우리 조규일 시장께서 한번 검토해 시행해 봄도 좋을 듯하다.

구라로 입을 뗐으니 저 대륙의 웅혼한 기상을 품은 유장한 민족구라 ‘백구라’께서 ‘황구라’를 향해 읊으셨다는 전승 구라 한편을 소개하고 맺는다.

“석영아 들어라.

저 넓은 만주 벌판의 우리 여인네들이 한번 월경을 하면

그 설원이 모두 장엄하게 핏빛으로 물들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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