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조식 선생 발자취를 따라서>

서울에서 진주는 천릿길이다. 지금이야 교통수단과 길이 좋아서 3시간 30분이면 올 수 있지만 조선 시대는 머나먼 길이었다. 서울에서 촉망받던 최영경(崔永慶1529~1590)이 일가족 모두를 데리고 진주로 내려온 까닭이 궁금했다. 남명선생이 돌아가시자 뜻을 잇기 위해 천릿길을 주저하지 않았다. 진주 도동 만죽산 기슭 대나무 숲속에 집을 지어 수우당(守愚堂)이라고 했다.

 

▲ 진주 연암도서관과 남강초등학교 사이에는 수우당 최영경의 집터가 있다. 집터였던 곳에

1936년 수우당의 위패를 모신 도강서당(道江書堂)을 세웠다. ‘선조사제문비’ 안내 이정표를 따라가면 된다.

진주 연암도서관과 남강초등학교 사이에는 수우당 최영경의 집터가 있다. 집터였던 곳에 1936년 수우당의 위패를 모신 도강서당(道江書堂)을 세웠다. 남강(藍江)가 도동(道洞)에 서당이 있어 도강서당이라 이름 지었다. 이곳에 조선 선조가 보낸 사제문를 새긴 비, ‘선조사제문(宣組賜祭文碑) 비’가 있다.

남강초등학교 근처에서 150m라는 이정표를 따라 골목길을 들어가면 길 끝자락에 도강서당이 나온다. 서당 바로 앞에 세탁공장이 있어 서당을 가려 아쉽다.

 

▲ 남강초등학교 근처에서 150m라는 이정표를 따라 골목길을 들어가면 길 끝자락에 도강서당이 나온다.

서당 바로 앞에 세탁공장이 있어 서당을 가려 아쉽다.

서당 앞 정문 왼쪽에는 1992년에 세운 ‘수우당 선생 신도비(贈 嘉善大夫 司憲府 大司憲 守愚堂 崔先生 神道碑)’가 서있다. 오른쪽에는 ‘증 사헌부 대사헌 수우당 최영경 선생 유허비’가 있는데 주변 개발 등으로 이곳으로 옮겨 세운 것이다. 옛날에 대나무가 많아 만죽산(萬竹山)이라 불렸다는 말처럼 서당 주위에 대나무가 무성해 잠시 돌담을 따라 돌았다.

 

▲ 도강서당 앞 정문 왼쪽에는 1992년에 세운 ‘수우당 선생 신도비(贈 嘉善大夫 司憲府 大司憲 守愚堂 崔先生 神道碑)’가 서있다.

서당 정문에는 유정문(由正門)이라 적혀 있다. 정도(正道)를 걷고자 노력했던 수우당을 찾으러 가는 문을 들어서면 10월부터 11월 사이에 하얀색 꽃이 피는 향기로운 구골목서가 왼쪽에서 반긴다. 구골목서는 구골나무와 목서나무의 교배종으로 은목서라고 부른다.

 

▲ 도강서당 정문에는 유정문(由正門)이라 적혀 있다. 정도(正道)를 걷고자 노력했던 수우당을

찾아 가는 길이다.

오른쪽에 비각이 있는데 두 개의 비석이 있다. 둘 다 1594년 동북아국제전쟁(임진왜란) 와중에 선조가 최영경을 대사헌에 제수하고 죽음을 애도하며 내린 제문을 새긴 비다. 오른쪽이 요즘에 새로 만든 비석이고 왼쪽 것이 원래 비석이다. 1821년 지역 유림이 선조가 내린 제문을 덕천서원에 세웠는데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서원이 헐리면서 여기로 옮겨 세웠다.

 

▲ 도강서당에 있는 ‘선조사제문비’는 1594년 동북아국제전쟁(임진왜란) 와중에 선조가 최영경을 대사헌에 제수하고 죽음을 애도하며 내린 제문을 새긴 비다.

왕이 직접 제문을 내리고 비석을 세우게 한 사례는 드물다고 한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만력 이십 이년(1594년) 세차 갑오 십이월에 국왕이 신 예조정랑 정홍좌를 보내어 증 사헌부 대사원 최영경의 령에 고하여 제사를 지내노니 유영(維靈)은 아아 슬프다 어쩔 수 없도다. 그 죄 무엇인가. 화가 그대에게 전가되었도다. 경은 아름다운 선비, 물외(物外)에 우뚝 서서 높은 품격과 뛰어난 절개는 넉넉히 풍속을 다듬고 세상에 은둔한 지 십 년에 생추(生芻)한 묶음이다.~나의 아픈 마음 이제 더욱더 깊어져 이에 제문을 내려 애오라지 슬픈 정성을 펴노니 정령이 있거든 흠향하기 바라노라”

 

▲ 도강서당

1589년 정여립이 반란을 꾀한다는 고변에서 시작해 1591년까지 그와 연루된 많은 동인(東人) 쪽 사람들이 희생된 기축사화(己丑士禍)를 수우당도 피해갈 수 없었다. 모반사건의 주모자 길상봉(吉三峰)으로 몰려 수우당은 1590년 9월 옥중에서 바를 정(正)자를 크게 쓴 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 진주 도강서당 마당 한쪽에 있는 구골목서

문득 의심이 들었다. ‘정통성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선조가 집권 안정을 위해 사림의 분열을 조장한 것은 아닐까. 중종의 손자이자 덕흥대원군 셋째 아들로 왕위 계승 순위에서 멀어져 있던 선조가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조정에 의해 임금으로 추대되었다. 정통성이 취약했던 선조는 동서 붕당 대립 구도를 이용해 집권 강화를 노렸을 듯하다. 옥사가 마무리된 뒤 선조는 정철이 서인의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연루시켜 정적을 숙청했다며 강계로 유배를 보냈다.

마루에 오르자 햇살이 모여든다. 바람이 머물다 간다. 바람은 수우당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준다. 효성이 지극했던 수우당은 모친이 병환이 나자 팔뚝의 피를 약과 함께 드리기도 했다. 부친이 6월에 돌아가시며 홍시를 찾았으나 얻어 드리지 못해 수우당은 평생 홍시를 차마 먹지 못했다. 시묘살이할 때 하루는 생선과 고기를 올리지 못해 통곡하니 호랑이가 산돼지를 상석에 놓고 갔다고 한다.

 

▲ 진주 도강서당에서 바라본 풍경

대대로 벼슬을 이어온 집안으로 아쉬울 것이 없던 서울 사람이었다. 남명선생 연보에 따르면 1565년(수우당 실기는 1567년 남명선생을 뇌룡사에서 찾아뵈운 것으로 기록) 서울에서 동생 최여경과 함께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이해에는 정순왕후가 죽은 해로 국상 중이라 제자의 예(폐백)로 죽순 한 묶음으로 했다고 한다. 항상 가까운 곳에서 가르침을 받고자 했으나 병이 많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주 가르침을 받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 진주 도강서당 마루에서 바라본 청풍사

남명선생과 수우당은 그 스승의 그 제자답게 많이 닮았다. 친밀했다. <산해사우연원록>과 <덕천사우연원록> 등 조식의 다양한 문인록에 어김없이 앞자리를 차지한다. 1572년 남명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장례를 준비하며 상복을 입지 않아도 상제와 같은 마음으로 말과 행동을 삼가고 조심하는 심상(心喪)을 3년간 했다. 장례 때 이조정랑 덕계(德溪) 오건(吳健)이 맨 먼저 서고 다음에 수우당이 선 뒤 제자들이 순서대로 자리했다.

 

▲ 진주 도강서당 내 청풍사 정문 앞에 갈라진 시멘트 바닥 사이로 기다란 병 모양의

꽃 모양에서 비롯된 긴병꽃풀이 햇살에 샤워 중이다. 꽃말처럼 봄을 기다리는 중인 모양이다.

남명선생을 모신 서원은 수우당이 주도해 1576년 ‘덕산서원(德山書院)’이란 이름으로 창건했다. 서원 창건할 때 서원 앞 시냇가에 푸른 소나무 백여 그루를 심었다. 이중 수우당이 직접 한 그루를 심어 수우송(守愚松)이라 불렸는데 지금은 나무가 없다. 임진왜란으로 불타고 난 뒤 새로 중수하면서 수우당을 사당에 배향했다. 사액을 받으면서 덕산서원은 현재의 덕천서원(德川書院)이 되었다.

 

▲ 진주 도강서당 내 수우당 최영경의 위패를 모신 청풍사

스승을 닮은 수우당은 말이 아닌 실천을 강조하며 부조리한 현실을 예리하게 주시하고 엄정한 출처의식에 입각해 단행한 처사로 살려 노력했다.

문 너머로 수우당 위패를 모신 청풍사가 보인다. 수우당의 높은 절개를 뜻을 찾아 청풍사로 걸음을 옮기는데 서당 앞 산앙문(山仰門) 갈라진 시멘트 바닥 사이로 기다란 병 모양의 꽃 모양에서 비롯된 긴병꽃풀이 햇살에 샤워 중이다. 꽃말처럼 봄을 기다리는 중인 모양이다.

 

▲ 옛날에 대나무가 많아 만죽산(萬竹山)이라 불렸다는 말처럼 진주 도강서당 돌담 옆으로 대나무가 무성하다. 수우당 최영경을 떠올리며 잠시 돌담을 따라 돌았다.

위패를 모신 청풍사로 걸음을 옮겼다. 매년 음력 4월 15일 새로 나는 나물과 생채소로 스승을 기려 제사를 지내는 석채례(釋菜禮)를 봉행하고 있다. 청풍사의 편액처럼 시원하고 맑은 바람(淸風)이 불어 세상이 더 맑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예를 올렸다.

※ 자료 도움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에서 펴낸 <수우당 최영경(경인문화사 출판사)>

남명학연구원에서 엮은 <덕계 오건과 수우당 최영경(예문서원 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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