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대, ‘사심없이’ 재판거래와 사법농단에 전념했다?

젊은 법관들이 일을 냈다. 전국법관대표회의가 사법농단 의혹에 연루된 현직 판사들에 대해 탄핵소추 절차를 검토해야 한다고 의결한 것이다. 법관회의는 “법원행정처 관계자가 정부 관계자와 특정 재판의 진행 방향을 논의하며, 일선 재판부에 특정한 내용과 방향의 판결을 요구하고 의견을 제시한 행위가 중대한 헌법 위반행위라는 데 인식을 같이한다.”는 내용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번 의결안은 대구지법 안동지원 소속 판사 6명이 지난주 “명백한 재판독립 침해 행위에 대하여 위헌적인 행위였음을 우리 스스로 국민에게 고백해야한다”고 호소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들이 “지금 시점에서 판사들이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행동”이라고 적시한 탄핵촉구안에 다수의 법관 대표들이 동의한 것이다.

법관대표회의는 전국에 산재한 각급 법원의 대표 판사 110여 명으로 구성된 현직 법관들의 공식 대표기구이다. 비정기적으로 열려왔던 법관대표회의는 최근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 당시 법원행정처가 판사들의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다는 의혹을 계기로, '제왕적 대법원장'을 견제하고 법원 내부의 수평화를 위해서 전국법관대표회의 상설화 요구가 거세지면서 지난 4월부터 공식 기구가 되었다. 탄핵으로 헌법 위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일선 법관들의 목소리는 뒤늦게나마 시민들과 양심적인 법조인들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법관들을 대표하는 공식기구가 탄핵 필요성을 제기한 것은 추락할 대로 추락한 사법부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구시대의 권위주의적 상하관계가 엄존하는 법관 사회 스스로 변화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해석된다.

▲ 최용익 전 MBC논설위원

그동안 법원 밖에서만 논의가 분분했던 법관 탄핵안을 법관회의가 의결한 데에는 ‘사법 농단’ 사태의 엄중함과 국민의 신뢰를 영원히 잃을 수 있다는 위기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부결될 경우, 판사들의 자정 의지와 노력이 완벽하게 부정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번 기회에 확실히 과거와 단절해야 한다는 의지가 강해 통과될 수 있었다”는 참석 판사들의 뒷얘기가 이를 방증한다. 특히 “사태의 시발점이었던 ‘판사 블랙리스트’와 관련해 ‘뒷조사는 했지만 인사 불이익은 없었다’고 사실을 왜곡했던 책임자들에 대한 분노가 컸다”는 말은 검찰 수사과정에서 밝혀진 판사들에 대한 인사상의 불이익이 실질적인 탄핵 요구의 동력이 됐음을 시사한다.

법관대표회의의 탄핵안 검토 요구는 사법부의 독립과 책임을 담보할 감시 수단으로서 활용될 수 있는 제안이다. 입법, 사법, 행정 3권간의 견제와 감시가 제도화된 민주주의 국가에서 헌정 사상 법관 탄핵 소추가 단 한 차례도 없었다는 것 자체가 비정상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두 번씩이나 탄핵 소추 한 바 있는 국회가 법관에 대해서는 한 번도 실행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은, 국민들의 일상과 동떨어진 채 ‘그들만의 리그’로 존재해온 ‘성역화된 사법부’의 현주소를 웅변한다.

특기할 만한 것은 대법관 출신으로서는 처음으로 검찰청 포토라인에 선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이다. 박병대는 이미 구속기소된 전 법원행정처 차장 임종헌의 직속상관으로서 ‘양승태 대법원’ 시절의 법원행정처장 3명 가운데 가장 많은 범죄 혐의를 받고 있다. 일제 강제징용 재판 개입과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처분, 원세훈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판결 등 30여 개에 이른다. 그는 “법관으로 평생 봉직하는 동안 나름 최선을 다했고 법원행정처장으로 있는 동안에도 사심 없이 일했다”면서 ‘재판 거래가 사법행정에 포함됐다고 생각했느냐’,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지시가 있었느냐’ 등 쏟아지는 취재진의 질문에도 “저는 사심 없이 일했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으로 갈음하겠다”고 ‘사심이 없었다’는 것을 되풀이해 강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박병대가 했다는 말은 미국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개념을 연상시킨다. 나치의 친위대 중령으로 유대인 학살 전범으로 기소된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하고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아이히만이 유대인 말살이라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것은 태생적으로 타고난 악마적 성격 때문이 아니라 아무런 생각 없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는 '사고력의 결여'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렌트의 주장은 엄청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악의 화신으로 여겨졌던 인물의 '악마성'의 근원이 평범한 곳에 있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아이히만은 평범한 가장이었으며 자신의 직무에 충실한 모범적 시민이었다는 사실이 많은 사람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학살을 저지를 당시 법적 효력을 가지고 있는 히틀러의 명령을 성실히 수행한 사람에 불과했고 평소엔 매우 '착한' 사람이었으며, 개인적인 인간관계에서도 매우 '도덕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일의 수행 과정에서 어떤 잘못도 느끼지 못했고, 자신이 받은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다면 아마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박병대는 차기 대법원장 0순위로 불렸으며, 탄핵된 전 대통령 박근혜 시절 법조계를 쥐락펴락했던 우병우도 그 앞에서는 “쩔쩔 매는” 관계였다고 한다.(MBC 탐사보도 프로그램 <스트레이트> 2018년 8월 5일 방송분) 카리스마도 대단해서 별명이 ‘박카리’였으며, 퇴임시 그의 후배들이 만들어준 1600쪽짜리의 헌정 문집에는 그의 후배들이 쓴 ‘나의 수퍼에고, 박대법관님’, ‘저에게 보내주신 답장메일을 10년 동안이나 무공훈장처럼 간직하고 있습니다’ 등 낯뜨거운 표현들이 넘쳐나고 있단다. 이런 박병대도 오로지 국가를 위해, 사법부를 위해 ‘사심없이’ 일제 강제징용 재판과 통합진보당 국회·지방의회 의원들의 지위확인 소송 등의 재판에 개입하고,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처분과 원세훈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판결에 관여했다는 것이다. 법적 효력을 가진 자신의 상관인 양승태의 명령에 따라서(?) ‘사심없이’ 말이다. 양승태가 포토라인에 서게 되면 어떤 말을 할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문제는 공을 넘겨받은 국회다. 국회의 법관 탄핵소추안은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 발의와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의결된다. 민주당과 평화당, 정의당에 무소속 등을 합하면 탄핵안 의결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 그러나 자유한국당(이하 자유당)과 마른미래당이 부정적이다. ‘사법부가 판사 탄핵소추에 개입하는 것은 삼권분립을 훼손하는 것’이라는 논리로 법관대표회의의 의결을 ‘법원 스스로 다른 한쪽 판사들을 적폐로 규정하고 편을 가르는 행위’로 몰아붙이고 있다.

같은 사안을 보는 시각이 이렇게 180도 다르다. 고백성사처럼 힘겨운 과정을 거친 뒤에 나온 법관대표회의의 결론인 ‘탄핵 검토 요구’를 ‘사법부 내부에서 나온 자성과 개혁의 목소리’라고 평가한 민주당과 ‘삼권분립 훼손’ 혹은 ‘분열행위’라고 매도하는 두 보수당의 주장을 비교해보라. 이미 남북 교류사에 한 획을 그은 금자탑으로 평가되고 있는 ‘평양공동선언’의 발표 때부터 사사건건 어깃장을 놓고 있는 자유당은 사법농단에 대한 검찰수사를 노골적으로 방해하고 있는 법원의 행태를 막기 위해 추진되고 있는 특별재판부 설치법에 대해서도 두 달째 논의를 거부하고 있다. 법관회의가 자신의 환부에 칼을 대는 자세로 용기있게 결정한 ‘사법농단 관련 법관들에 대한 탄핵’의 국회 통과가 녹록치 않아 보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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