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농사를 열심히하는 농부들에게 고맙고, 그들을 응원한다.

논밭이 비자 집안이 풍성하다. 아래채 툇마루엔 이런저런 자루가 가득하다. 가을은 그렇게 집안으로 들어왔고, 빈 논밭 고라니 발자국마다 겨울이 조금씩 두께를 더해가는 나날. 얼추 스무 되나 되는 들깨는 잘 말려 김장독 비닐봉지에 갈무리했고, 산마와 토란은 종이상자에 담아 아래채 아궁이 곁에 덮어두었다. 대추는 말려 양파망에 담아 처마 아래 대롱대롱 걸어두었고, 겨우내 먹을 고구마는 안방 구석에 쌓았다.

아직 마루에서 뒹구는 누렁호박은 오가리로 만들어야 하고, 채반에 말린 우엉은 볶아 우엉차로 만들어야 한다. 은행과 호두와 땅콩은 너무 마르기 전에 껍질 까서 냉장고에 넣어야하고, 더 추워지기 전에 메주 쒀서 처마 아래 걸어야 한다. 내일은 무 뽑고, 무청 엮어 걸어야 한다. 빈 가지에 걸린 햇살만큼이나 가을도 짧게 남았다.

▲ 김석봉 농부

“보소. 작년에 샀던 쌀 올해는 못 살까?” 며칠 전 골목에서 마주친 뒷집 두부박샌댁이 나를 붙잡았다. 젊어서 두부를 만들어 팔러다녔다고 해서 붙여진 택호가 두부박샌댁이었다. “아, 그때 그 쌀말이지요?” 퍼뜩 작년 일이 생각났다. 읍내에 커다란 식자재마트가 개업을 하는데 20kg 짜리 쌀 한 포에 이만칠천오백 원이었다. 싸도 너무 싸다 싶었다. 전단지를 받아와 평상에서 펴 보이며 이런저런 물건 가격을 짚어보는데 뒷집 아주머니가 그 쌀을 좀 사달라고 했고, 두 포대를 사드린 적이 있었다.

“요즘 쌀값이 너무 올라 이십 키로 한 포에 오만 원 아래로는 없어요.” “그러게. 올라도 너무 올라서 큰일이네......” “내가 다음에 읍내 나가면 큰 마트에 쌀값 알아보고 말씀드릴게요.”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서는 뒷집 아주머니는 낙담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그런 쌀값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비단 두부박샌댁만이 아니었다. 마을사람 대부분이 그랬다. 그 많은 논들은 거의 밭으로 바뀌었다. 논농사가 밭농사보다 훨씬 쉽지만 돈이 안 되자 쌀농사를 포기하고 밭작물을 심기 시작했다. 쌀농사를 하는 집은 열손가락으로 꼽아도 손가락이 남을 지경이었다. 영남아지매도 좀 싼 쌀이 어디 없겠느냐고 물어왔었고, 옆 골목 노샌도 고추밭 언저리에서 만났을 때 쌀 걱정을 늘어놓았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논을 빌려 몇 년 쌀농사를 했었다. 네 마지기 쌀농사를 했는데 겨우 20kg 짜리 스무 포가 나왔다. 논 임대료로 네 포 주고 나니 열여섯 포 남았는데 농사에 든 비용은 고사하고 우리 한 해 식량에도 모자라는 것이었다. 밑져도 한참 밑지는 농사였다. 세 해 쌀농사 끝에 영영 포기해버렸었다.

“인터넷으로 쌀 시켰어.” 며칠 전 아내가 밥상머리에서 말했다. “얼마래?” “오만 원, 이십키로에.” “인터넷에서도 비싸네?” “마트에 가봤는데 오만 원 밑으로는 없어. 다 육만 원 가까이 하더라고.” “햅쌀 풀리면 좀 안 떨어지려나?” 무심코 말하면서도 나는 마른입맛을 다셨다. 퍼뜩 내년엔 쌀농사도 좀 해볼까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쌀값이 이대로 고정된다면 밭으로 쓰는 논에 다시 쌀농사를 하겠다는 이웃이 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쌀농사를 했을 때의 가을은 가을다웠다. 마당 한쪽에 볏가마가 수북이 쌓였을 때의 가을이 그야말로 농부의 가을이었다. 방앗간을 다녀와 큰집에도 사돈께도 쌀 한포씩 보내주려 택배기사를 기다릴 때의 그 기분이 그야말로 가슴 벅찼다. 직접 지은 햅쌀로 처음 밥을 지었을 때의 그 감격스런 순간은 영영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쌀농사를 시작한 첫 해 그 가을, 방앗간 트럭에 쌀 포대를 싣고 집으로 들어설 때의 나는 이 세상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해 가을 그 햅쌀로 지은 고봉밥을 먹을 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몇 년째 볏가마를 들이지 않는 가을을 맞이하면서 쌀농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져보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막상 농사를 시작하는 봄을 맞이하면 경제성을 따지게 되고, 내 몸 상태를 돌아보면 쌀농사는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쌀 한 포 오륙만 원에 사먹어도 그것이 더 편하다싶었다.

그런 쌀값이 막상 오만 원이나 하니 자꾸만 묵은 논에 눈길이 가는 거였다. 너댓 마지기만 지어도 양식은 걱정 없을 거였다. 허리, 무릎, 손가락 마디마디가 아프다가도 농사철이 되면 가라앉는 것이 농부의 몸이다. 쌀값이 오른 뒤로 ‘건너편 묵정논 주인을 찾아가볼까?’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엊그제가 농민의 날이었다. 많은 농부들이 서울에서 데모를 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조금 오른 쌀값을 내리려는 정부에 저항하는 농부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식당에서 파는 공기밥 한 그릇 쌀값이 이백삼십 원이라고 한다. 라면 반 봉지 값도 안 된다.

라면 하나는 예사로 끓여먹으면서 한 공기 삼백 원에도 밑도는 쌀값이 비싸다고 생각하는 나는 정녕 농부인가. 쌀농사는 돈이 되지 않는다고, 이정도 쌀값이면 사먹는 편이 훨씬 경제적이라고 생각한 나는 옳은 농부인가. 조금 오른 그 쌀값을 비싸다 여기면서 포기했던 쌀농사를 다시 시작해보려 마음먹는 나는 진정한 농부인가.

양파농사나 잘 지어야겠다. 올해처럼 감자농사도 잘 지어야겠다. 고구마도 조금 더 심어야겠다. 쌀농사 열심히 하는 농부님들 쌀을 고맙게 여기면서 사먹어야겠다. 한 공기 삼백 원으로 오른 쌀값을 다시 이백삼십 원으로 내리려는 정부에 대들어 데모하는 농부님들께 응원의 박수도 보내면서 살아야겠다.

오늘부터 김장준비를 한다. 툇마루를 가득 채운 고추포대는 방앗간에 보내 빻아오고, 부대에 담긴 생강도 손질해야 한다. 멸치젓갈 다리는 아궁이 앞에 앉아 마늘도 까야한다. 그러다가 오후, 산그늘이 내리고 쓸쓸함이 몰려오는 시각에 작은 손수레 끌고 오솔길을 걸어갈 것이다. 숲 언저리 주인 잃은 야생모과나무 샛노랗게 익은 모과를 따 올 것이다. 그렇게 마지막 남은 햇살의 온기마저 집안으로 들이고 나면 빈 밭엔 서릿발이 돋고, 빈 오솔길엔 꿈처럼 하얗게 눈이 쌓이겠지.

그래, 딱 이렇게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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