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의 변천에 대하여

처음에 촉석성 또는 촉석산성이라 불리던 진주성은 언제부터 존재했을까? 여러 가지 역사적 상황을 고려해 봤을 때, 진주성은 삼국 시대 이전부터 존재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그러나 이를 입증할 자료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진주성 축성에 관해 남아있는 기록으로는 하륜의 『성문기』가 가장 오래되었다. 이에 따르면 “고려 우왕 3년(1377년)에 왜구를 막기 위해 무너진 옛 성터에 토성을 쌓았으나 오래가지 못하고 곧 무너졌으며, 다시 우왕 5년(1379년)에 진주목사 김중광이 흙 대신 돌로 성을 쌓았다.”고 나와 있다. 이를 봤을 때, 고려 시대에 토성이 있었고, 최초의 석성은 고려 말인 1379년에 쌓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토성의 존재는 현재 발굴 중인 내성 동쪽에서 며칠 전(10월23일자 보도 참고) 토성의 유적이 나타남으로써 명백한 사실로 확인된 셈이다.

▲ 조창래 역사진주시민모임 공동대표

1379년 쌓은 최초의 석성은 원래 있었던 토성의 위치에 건설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그 규모는 위 『성문기』에 “서 ‧ 남 ‧ 북 세 곳에 성문이 있었으며, 성 둘레가 팔백 보, 높이는 세 길(5m 내외) 남짓”이라 기록되어 있으니 그 대략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완성된 성의 모습을 하륜은 『성문기』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보니 청천이 서쪽을 둘러싸고 장강이 남쪽에서 흘러가며 品자 황이 동쪽에 벌여 있고 세 곳 못이 북쪽을 감아 돈다.」

이 석성을 축조하기 전에는 진주가 왜구의 침탈을 받아서 참화를 겪은 적도 있었으나 석성이 완성되고 난 뒤에는 왜구가 감히 침탈할 생각을 못했다고 한다.

진주성은 왜적의 침입 가능성이 높아지던 선조 24년(1591년), 이에 대비하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경상도와 전라도의 성을 정비할 때, 당시 경상도관찰사 김수에 의해 성이 크게 확장 축성되었다. 성을 확장함으로써 성문은 모두 5곳(서문, 남문, 구북문, 신북문, 동문)으로 늘어 았다. 이때 확장 축성된 진주성에 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사를 하나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경상감사 김수는 더욱 힘을 다해 봉행하여 축성을 제일 많이 하였다. (중략) 그러나 크게 하여 많은 사람을 수용하는 것에만 신경을 써서, 험한 곳에 의거하지 않고 평지를 취하여 쌓았는데, 높이가 겨우 2~3장(丈)에 불과했으며, 참호도 겨우 모양만 갖추었을 뿐, 백성들에게 노고만 끼쳐 원망이 일어나게 하였는데, 식자들은 결단코 방어하지 못할 것을 믿고 있었다. 」 (『선조실록』 25. 선조 24년 7월 1일, 국역본)

김수는 성을 넓혀야만 충분한 인원을 수용할 수 있어서 성을 지키기에 유리하다고 판단하였지만, 확장으로 인하여 도리어 방어에 취약해지는 문제점을 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점 때문에 임진왜란 1차 전투(진주대첩)에서 승리하기는 했지만, 낮은 동쪽지역에서는 방어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결국 2차 전투에서는 동쪽 성벽이 무너져 패전의 계기가 되었다.

2차 전투 패배로 함락된 진주성은 왜군에 의해 파괴되어 폐허가 되었다가 선조 36년(1603년)에 창원에 있던 경상우병영을 진주로 옮긴 일이 계기가 되어 진주성은 중축되게 된다. 당시 경상우병영 성의 축조를 주관한 경상우병사 이수일은 과거 김수가 확장했던 진주성의 규모가 너무 크고 저지대가 포함되어 있어서 방어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방어하기 좋은 좀 더 높은 곳으로 물려서 성을 쌓으면서 내성도 함께 쌓았다. 이때 중축된 진주성에는 동문이 없어져서 네 개의 문이 있었으며, 내성에도 두 개의 문이 있었다. 18~9세기에 그려져 현재 전하는 진주성도의 대부분은 이 경상우병영 성을 그린 것이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를 정리를 하면 중간에 수축은 몇 차례 있었지만 1377년 이전의 토성, 1379년에 쌓은 최초의 석성, 1591년의 확장된 석성, 1604년의 경상우병영 성까지 크게 네 차례 변화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진주성의 변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2013년 경상대박물관에서 전국의 진주성 지도에 관한 자료를 모아 전시회를 개최했을 때 촬영한 자료를 제시한다. 물론 이 자료는 전시회 당시까지 나타난 자료를 토대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이후 새로운 자료들이 나오게 되면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 것이다. 진주성을 이해하는데 조금이라도 참고가 되기를 바라면서…

 

▲ 조선시대 진주성의 변화 예측도

* 이 글은 김준형 교수(경상대)가 발표한 연구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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