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불가 중딩들의 럭비공 여정

"오늘 하루 어땠어?" 퇴근하고 식탁에서 아들과 마주 앉으면 언제나 묻는 말이다. 아들의 하루는 첫마디에 모든 게 담겨있다. 대개는 ‘괜찮았어요’로 시작해 친구들과 장난친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다가 선생님들 표정이나 말투를 흉내 내면서 마무리. 그러면 그날 하루는 정말 좋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별로야"가 먼저 나오면 그때부턴 준비가 필요하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춘기 소년의 사나운 여정을 수용할 마음의 준비.

그날은 두 번째 경우였다. 어쩐지 아들의 얼굴이 평소와는 조금 달라보였다. 약간 부은 거 같기도 하고. "왜? 무슨 일인데?" 아들은 툭 던지듯이, 허세를 담아 말했다. "버스 안에서 때리대" 콩나물국을 뜨던 나는 손을 멈추었다. 버스라니 학원 버스? 기어이 일이 터졌구나. 지난주부터 아들과 툭닥거리던 친구가 있었다. 늘 그렇듯이 처음에는 장난이었다. 같이 놀다가 아들이 친구를 놀렸는데, 그 친구가 화가 났고, 결국 버스 안에서 돌발 상황이 발생한 것.

▲ 재인 초보엄마

사람이 화나면 머리카락도 부들부들 떨 수 있다는 걸 처음 봤다. 남편은 밥숟가락을 집어던지고 당장 학원으로 달려갈 기세였다. 일단 남편을 진정시키고 아들의 얼굴을 살폈다. 피가 나거나 멍이 들진 않았다. "어떻게 맞았는데?" "내가 앉아있는데 일어나서 주먹으로 파바박" 상황이 그려졌다. 내 주먹이 울었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 했어?" "손으로 가드치고 있었어요" 아들은 권투 선수가 얼굴을 가리고 상대 공격을 막을 때 하는 동작을 취해보였다. 나도 모르게, 이 말이 튀어나왔다. "너는 왜 안 때렸어?" 말해놓고도 아차 싶었지만 내 새끼가 맞았다는데. "짜식, 주먹이 물주먹이라. 하나도 안 아프더라." 끝까지 허세를 놓치지 않는 아들에게 벌컥 화를 내며 따져 물었다. "물주먹이고 뭐고 너는 왜 안 때렸냐고!"

아들은 유레카를 외치듯이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완벽한 피해자가 되기 위해서요" 이건 또 뭔 소린가. 더 이상 차분하게 대화를 이어가기엔 내 심리상태가 고르지 못했다. 그래도 다시 한 번 아들의 얼굴과 몸 상태를 확인했다. 약간 부은 느낌. 그렇다고 결코 조용히 넘어갈 일은 아니었다. 특히 마지막 말이 목에 걸렸다. "내일 복수해줄 거에요. 그 찌질이"

학원 원장님께 전화를 걸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깜짝 놀라면서 내 마음을 위로하셨다. "어머니, 많이 놀라셨죠. 녀석들이 평소에도 장난을 많이 치는데 저런 말을 해도 되나? 싶게 위태위태할 때가 있더라고요. 저도 이 아이들을 다 이해하려면 공부를 많이 해야됩니다. 잘 놀다가도 싸우고 어디로 튈지 모르니까요." 무엇보다 싸움이 더 커질까봐 걱정이라고 했더니 다음날 수업하기 전에 둘을 잘 타일러보겠다고 하셨다.

끝으로 한마디만 더 물었다. "원장님, 그 찌지.. 아니, 그 학생은 평소에 어떤 학생인가요?" 하마터면 찌질이라고 할 뻔 했다. 사실 맘속에선 더 심한 욕도 했다. 감히 내 아들을 때리다니. 눈 뜨고 못 봐 줄 만큼 형편없는 찌질이가 분명하리라. "그 학생이요? 음~ 사실 둘이 좀 비슷합니다. 성격이나 공부하는 스타일, 성적도 비슷하구요. 둘다 좀 소심한 편인데 아마 그래서 더 부딪히는 거 같아요" 예상치 못한 답변에 당황한 나는 의례적인 인사 같은 걸 남기고 부랴부랴 전화를 껐다.

곧장 남편에게 갔다. 남편은 아까부터 입맛을 잃고 밥숟가락을 놓은 상태였다. 원장님과의 통화 내용을 설명하고 그를 좀 다독였다. 남편에게도 위로가 필요했다. 우리 조금만 더 지켜보자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놓고는 아들의 방문을 두드렸다. 따뜻한 차를 한잔 가져갔다. "이거 마시면 몸이 따듯해지고 기분도 좀 풀릴거야" 그 순간에도 아들은 열심히 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 와중에도 폰이 눈에 들어오냐고 따지고 싶은 것을 겨우 참고 물었다. "뭐 봐?" 아들이 화면을 보여주었다. 아까 그 찌질이와 카톡으로 2차전을 벌이고 있었다.

학창시절 나의 싸움들을 소환해보았다. 별 건 없었다. 어제 친했던 친구가 오늘 다른 아이와 손잡고 화장실 가면 눈에 불이 나는 정도? 그래서 말 안하고 끙끙 앓다가 집에 와서 일기장에 온갖 욕을 섞어가며 모든 걸 쏟아내는 걸로 화풀이를 대신했다.

남편은 말로 싸운 기억이 별로 없다고 했다. 영화에서 보던 장면들이 그려졌다. 21세기 신인류, 중딩 아들은 카톡으로 싸우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치열하게. 혹시 이러다 나중에 ‘현피(현장에서 직접 만나 싸운다는 뜻의 은어)’를 뜨는 건 아닐까. 아들에게 주워들은 전문 용어들이 머릿속에 사나운 장면을 펌프질 했다. 그들의 카톡전은 자정까지 이어졌다. 나는 이제 그만 자자고 뜯어말리는 것 밖에는, 다른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다음 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둘이 어떻게 됐을까? 만나서 또 싸웠으면 어떡하지? 퇴근시간, 현관문을 열자마자 신발을 던지듯이 내팽개치고 아들을 불렀다. 생각보다 평온했다. "걱정 마, 엄마. 복수했어" 평온했다는 말 취소. 내가 잘못 봤나보다. 복수라니. "그 찌질이가 울면서 사과하대. 그래서 안받아줬어. 복수한 거지"

그랬구나. 다행히도 아들은 어제보다 한결 마음이 풀려있었다. 그날 저녁 식탁에선 아들의 기분을 맞춰주는데 오롯이 집중했다. "걔가 얼마나 찌질하냐면요..."로 시작된 찌질이의 너저분한 과거 행적들을 들으면서 밥알의 숫자만큼 맞장구를 쳐주었다. "와, 그 찌질이 진짜 어이없다, 초딩이야?"

식사를 마치고 다시 차를 준비해서 아들의 방문을 두드렸다. 아들은 카톡을 하고 있었다. 숙제할 시간인데. 최대한 짜증을 누르고 부드럽게 물었다. "누구야?" "아, 그 찌질이요. 카톡으로 미안하다고 또 사과하네. 그냥 받아줬어요. 짜식" 아들의 얼굴이 한층 펴졌다. 내 마음도 펴졌다. 할 수만 있다면 나도 그 아이에게 카톡을 보내고 싶었다. 사과하는 용기를 보여줘서 고맙고 함부로 찌질이라고 해서 미안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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