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주헌(運籌軒) 복원에 거는 기대

진주 사람들 가운데, 옛날 진주에 도청(감영)이 있었다는 사실은 알지만 어디에 있었는지는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도청은 진주성의 영남포정사 안쪽, 즉 북장대의 아래쪽에 있었다. 그러니까 영남포정사는 도청(감영)의 정문이었던 셈이다.

원래 이곳에는 1604년 설치된 경상우병영의 본영이 있었다. 그리고 우병영의 중심 건물로서 우병영 병마절도사(병사)의 집무실이었던 운주헌(運籌軒)이 있었다. 그런데 290년 이상 존속했던 경상우병영이 1895년 을미개혁으로 혁파되면서 운주헌의 현판이 내려졌다. 1895년 5월 행정 구역 개편(8도 → 23부)이 되면서는 그 건물에 진주관찰부가 설치되었다. 다시 1896년 8월 행정 구역이 13도 체제로 개편되자 건물은 경상남도 관찰사가 집무하는 정청(政廳)인 선화당(宣化堂)으로 현판을 바꿔달았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은 운주헌을 비롯한 우병영 건물들을 철거해 버렸다. 그리고 그곳에 일본식 건물을 지어 도청으로 사용하다가, 1925년 도청이 부산으로 이전하면서는 진주에 거주하는 일본인 관리들의 관사로 사용되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운주헌은 시민들의 기억에서 사라져갔다.

우병영의 핵심 건물이며, 경상남도 감영이었던 운주헌(선화당) 복원은 시민들의 염원으로 이어져 오다가 1997년 당시 진주를 방문한 김혁규 도지사에게 진주 시민들이 복원을 건의하며 표면화됐다. 1998년 예산을 확보하고 정확한 위치를 알기위해 발굴에 들어가 운주헌의 주춧돌 일부를 확인하는 성과가 있었으나 곧 벽에 부딪혔다. 그것은 운주헌 부지 위에 세워져 있는 두 집안의 사당들 때문이었다. 이 사당들을 이전하지 않고는 운주헌 복원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결국 사당 이전 노력이 두 집안의 반대로 실패했고, 운주헌 복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운주헌 복원을 위해 지원받았던 예산은 진주성 내북문(공북문) 복원에 전용되었다.

운주헌 복원은 금년 6.13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 출마하여 복원을 공약으로 제시한 후보가 시장에 당선되면서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런데 막상 복원을 시도해 보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당장 사당을 가진 두 집안을 설득해야 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이를 위해서는 진주성사업소 같은 하급부서에 맡기지 말고 시장이 직접 나서야 한다. 이번에는 훌륭한 선조를 둔 두 집안의 후손들도 현명한 판단을 하리라고 기대한다. 만약 두 집안에서 대승적 결단을 하여 사당 이전에 동의한다면, 나는 두 집안의 결단 사실을 기록하여 시민의 이름으로 복원되는 운주헌(선화당) 앞에 표지석으로 세워 후세인들이 잊지 않고 기억하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싶다.

시민들의 염원인 운주헌(선화당)의 복원을 위하여 전 시민들이 뜻을 하나로 모을 것과 진주시 집행부가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분발할 것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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