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아이가 통제할 수 없는 눈빛을 보이며 불안과 분노를 드러냈다. 
기숙사가 달린 학교에서 돌아오는 주말, 3월 초였다.

남편과 나는 매우 긴장했다. 무엇에서부터 이렇게 어긋났는가?

이제 아물어간다, 이제 자기 자리를 찾아간다고 생각해 왔다. 다시 과거를 헤집으니, 내가 놓쳤던 순간들이 살아나 아팠다. 아이를 이러다가 놓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지금 제대로 하지 않으면 그럴 수도 있다 생각되었다.

우리 부부는, 그 무엇보다 아이에게 집중했다. 박완서의 소설 '한 말씀만 하소서’의 참척의 고통이 생각났다.

미루어 짐작만 했던 그 고통이, 나의 경험치를 통해 생생하게 나의 것으로, 살아났다. 그 고통이 내게도 올 수 있다는.. 그러나 막을 수 있다, 막아야 한다는 절박함.

▲ 사진 / 방성철 시민기자

아이는 많이 좋아졌고 정확한 진단을 내려야 한다는 숙제를 남긴 채 네팔로 떠났다. 학교에서의 이동학습이었다. 4월 16일 학교에서 출발하였다. 그 날은 수학여행을 떠났던 안산 단원고 아이들이 참사를 당했던 일 년 전 그 날이기도 했다.

며칠 뒤, 카트만두에서의 일정을 다하고 다른 지역으로 옮겨갔을 때이다. 저녁 무렵, 둘째 아이와 주먹밥을 만들고 있었다. 일본식 주먹밥 오니기리를 떠올리며 즐거웠고 평온했다.

큰애 학교 밴드 소식을 훑어보다가 네팔에서 강진이 일어났고 우리 아이들은 안전한 곳에 있다는 학교 측의 알림을 읽었다. 지진소식을 뉴스에서 먼저 보고 아이를 떠올렸다면 굉장히 불안했을 것이나 그 반대여서 마음의 흔들림은 낮았다. 시간이 갈수록 피해규모가 커지는, 네팔 지진 뉴스를 보며 ‘우리 애들은 안전한 곳에 있는데, 아 저를 어쩌나?’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진이 계속되고 있고 큰 지진이 더 올 수도 있다는 소식을 들으며, 이게 무조건 안심하고 그 나라의 고통에 공감만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님을 직감했다. 아이들이 어느 지역으로 옮기는 것이 안전한가, 그 길은 괜찮은가 등 의문이 솟아 올랐다.

학교 밴드에서는 기도하며 차분히 기다리자는 댓글들이 달렸다. 지진 첫날이었다.나는 그건 아니다 싶었다. 그것에 생각을 같이 하는 부모들이 다음날 부모모임을 갖고 교육청을 찾아가고 학교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며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나갔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아이들은 티비 뉴스를 장식하며 돌아왔다. 그 과정 속에서 네팔의 아이들과 사람들을 걱정하고 더 큰 피해가 없기를 바라는 나의 기도가 얼마나 허위인가를 알았다. 생각보다 위험했고 위험한 판단 속에 내맡겨져있는 상황임을 알았고 내 아이를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 이것이 나의 권리이자 제일의 의무임을..

그 긴장했던 5,6일을 보내면서, 그리고 그 이후. 새롭게 다가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세월호의 아이들과 유가족들, 그리고 유가족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하는 실종자 가족들.

참사 일 년을 맞아 삭발을 하고 농성을 하며 진실규명, 제대로 된 세월호 시행령을 요구하다 물대포를 맞고 폭력을 당하고 있는 그 분들.

사고당시에는 그렇게 절절 매고 다 해줄 듯이 하다가 시간이 흘러흘러 이제는 일상으로 돌아가라는 정권에 분노가 치솟았다.

24시간 생중계로, 아이들이 사람들이 죽어가는 걸, 살리지 못하는 걸 봐내고 견뎌내야했던 그들에게 국가가 다시 벌이고 있는, 이 말도 안되는 기막힌 상황은 무엇인가? 내가 그 발가락만큼이라도 겪어보니 알겠다. 왜 그 분들이 참사 초기, 팽목항에서 청와대로 걸어서라도 가겠다고 나섰는 지..

진짜 어떻게든 갔을 것이다. 청와대로 가서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게 돼, 그래서라도 아이들을 구조할 수 있다면, 살릴 수 있다면 갔을 것이다. 그게 부모된 자들의 심정이다.

▲ 사진 / 방성철 시민기자

한때 자존감이 낮던 시절 나는, 울컥하는 분노와 깊은 우울 사이에서 순간적으로나마 죽어버릴까 했던 적 있다. 그건 순간인 거다. 엎어져 무릎을 깨거나 어쩌다 손을 베기만 해도 아프다. 약을 바르거나 피를 멈추기 위해 손가락을 심장 위로 들고 생각한다.

삶의 영역 속에 있기를 우리는, 얼마나 바라는가 하고. 나 자신에게 그러할진대 내가 낳은 자식의 안위는 더하다.

그런 이유로, 그 많은 재난영화에서 아이들을 구하려는 아버지와 엄마들이 주인공들로 등장하는 것이다.

세월호에 타고 있던 아이들과 사람들은 왜 죽었는가? 왜 그들은 제때 구조되지 않았는가? 부모들과 의문을 품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 제기에 정부는 왜 제대로 답하지 못하는가?

내 아이는 돌아왔고 많이 좋아지기도 하고 여전히 힘들어하기도 한다. 그러나 살아있지 않은가?

 

세월호를 잊지 않겠다는 약속을 나는 차마 스스로 못했다. 그것은 끝까지 책임지고 일상을 다 낸다는 것으로 나에겐 느껴졌다. 그 약속은 지키지 못할 약속이었다. 일 년이 지나 다시 봄이 왔다.

나는 일상을 즐기기도 하고 무엇을 계획하기도 하고 가능한 한 지금 이 순간 행복하려고 했다.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고 그러해야 한다고 믿는다.

내 아이가 무사히 돌아온 것에 감사하며 나는 세월호를 연관 짓는다. 그 논리적 연관을 묻지 마라. 그러하다. 그들과 함께하는 주 1회 한 시간의 일인시위를 하고 있다.

그리고 진주에선 세월호를 기억하고 진실을 밝혀내겠다는 생각으로, 매월 첫째 주 토요일 저녁 집회를 하기로 했다. 매주 집회나 매일 집회를 했던 지역에 비하면 참 옹색하다만 어쩌랴?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와 나의 아이들을 위해 세월호를 기억하고 진실을 밝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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