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 효율성의 패러다임에 지배될 때 공동체의 가치는 사라진다.

유토피아를 꿈꾸는 일은 정당하다. 그런 점에서 이 거대도시 서울에서 마을공동체를 꿈꾸는 일은 미래를 꿈꾸는 일이다. 이것은 동시에 ‘지금’ 성찰하는 것을 포함한다. 마을을 복원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일인 ‘지금’ 우리안에 존재하는 무엇을 간과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HOT6를 마시고 있다. 닝닝하고, 니끼한. 그 hot6는 권력의 세례이다. 마치 조지 오엘의 [멋진 신세계]에서 그 지도자가 우리에게 주는 세례와 같이 우리는 그것을 넙죽대며 받아 마시고 있다. 그리곤 말한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얼마나 달콤한가. 그 떠날 수 있는 날을 위해 열심히 hot6를 받아 마신다.

한강의 기적, 그 말만으로도 얼마나 두근거렸던가. 초등학교 시절 ‘100억불 수출과 국민소득 1000불’은 먼 미래에나 오는 신기루였다. 숫자개념도 없던 우리들은 그저 설레였다. 열심히 일하면 하루에 서울에서 부산까지도 갈 수 있는 날이 올 것이고, 열심히 일하면 우리도 머지않아 선진국처럼 마음껏 ‘자장면’도 먹을 수 있고, 열심히 일하면 퇴근하시는 아버지가 날마다 ‘종합선물세트’를 들고 오실 것이라 믿었다.

▲ 이윤호 진주문고 스토리텔러

정말로 사람들의 표정이 달라졌고, 어른들은 정말로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지금 그 칙칙했던 아이들이 이제 ‘우아한’ 어른이 되었을 때, 우리의 아이들은 ‘종합선물세트’ 따위엔 관심도 없다. 국민소득 1000불은 벌써 넘어섰고, 2만불 시대에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그러게 열심히 일했으니.

그런데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 비록 종합선물세트보다 더 값진 것들로 가득 찼으나 아버지는 사라졌다. 더 이상 아버지를 기다리는 아이들은 없다. 그들도 열심히 휘황찬란한 거리로 나가야 하니까. 우리에게 ‘저녁’은 사라졌고, 우리에게 ‘가정’은 전설이 되었다. 그리고 쌍용자동차의 22명의 노동자는 죽어야만 했다. 서울역을 중심으로 모든 기차역은 노숙자들의 사나운 표정으로 가득찼다. 그 ‘기적’은 진정 농촌을 죽이고, 도시를 건설했고, 그 기적은 여성을 ‘설겆이 통’으로 만들고, 근육을 단련시켰으며, 그 ‘기적’은 노동자의 죽음을 통해 자본의 영광을 얻은 것이었다.

내 유년기에 얼마나 ‘박카스’를 염원했는지 모른다. 정말 그리스신화의 그 엄청난 힘이 내안에 머물 것 같았지만 적어도 그 시절 ‘어른’들에게는 해서는 안 될 것들이 있었다. 이르자면 진정 인문적 교양이라 할까. 인간에 대한 예의라 할까. ‘피곤하면 자야지’ ‘애들이 무슨 박카스’ 박카스는 아이들에게 뼈가 녹는다고 금지되었다. 그러기에 그 판매처도 ‘약국’에 한정됐다. 몰래 공장의 여공들에게 ‘아티반’이나 ‘타이밍’을 먹이기는 했지만 그것도 결코 자랑할 수 없는 ‘금지’들이었다.

선진조국 건설의 이름으로 합리화되던 그 개발독재의 사납고 거칠은 손길이 이제 부드럽고 온화한 손길로 슬며시 포장된 채, 미래세대에게 다시 속삭인다. 선그라스에 군복을 차려입던 사나운 아버지 ‘박정희’에서 모든 것을 다 포용하겠다는 온화한 얼굴로. 그리고 우리는 박카스의 10배의 각성효과가 있다는 hot6를 마신다. 그 온화함의 그 뭉클거림 때문에. 박카스는 이제 편의점으로 이동할 것이다. 천연덕스럽게 슬며시 아침햇살이 새벽의 빛깔을 걷어내듯 그리고 편의점의 hot6는 냉장고를 채우기 무섭게 빠져나간다. 열심히 살아야하기에.

하루에 얼마의 노동이 가장 정상적이고, 얼마의 휴식이나 수면이 가장 정상적인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 우리는 분명 미쳐있다는 것이다. ‘미친공화국’ 공화란 참여를 통해 공공성의 가치로 환원된다고 하니, 그 공공성도 분명 ‘미친’ 것일 듯하다.

hot6는 역사적 은유이다. ‘부자되세요’가 뻔뻔하게 공중파를 타고 나오는 현실의 은유이고, ‘백만하나 백만둘’하는 에너자이저가 가치와 의미를 상실한 채 버젓이 드러나는 은유이다. 무엇보다 살짝 형태만 바뀐 개발독재가 만들어내는 역사의 은유이다.

압축적 근대화를 통해 우리는 불과 40년만에 유럽의 200년을 따라잡았다. 미국 뉴욕 마천루의 거대한 규모와 속도를 모델로 하여 거대한 한국식 민주주의와 거대한 한국식 근대화를 이루었다. 그 과정은 대다수의 시민들의 노동을 ‘짜’낸 것이고, 단란한 가족의 저녁을 상실하며 얻은 것이고, 동네어귀에 가게 앞 평상의 수다들을 지워버리고 얻은 것이다. 그야말로 마을은 지워졌다.

아드레날린에 중독된 사회다. 정말 일확천금이 존재했던 사회다. 부동산가치가 하루아침에 수십배가 뛰었던 사회이고, 주식이 수백배로 미친년처럼 널뛰었던 사회이다. 하늘을 오르기도 했고, 저 끔찍한 땅 속으로 곤두박질치기도 했다. 깡통계좌로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사라지기도 했고, 부동산거품이 꺼지며 신용불량자로 졸지에 담배값을 걱정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아드레날린은 흥분억제 호르몬이다. 그 호르몬은 한번 분비되기 시작하면 그 짜릿함은 결코 헤어날 수 없다. 도박도, 가정폭력도 이 아드레날린에 중독된 몸짓들이다. 그러니 이 사회가 만든 롤러코스터에 어찌 중독되지 않겠는가.

진정 이 미친 사회에서 HOT6는 신자유주의적 은유이다. 효율성의 단일가치가 모든 것을 붕괴시키고 자신의 마지막 승리를 선언할 때 HOT6는 그 효율성의 마지막 웃음이다. 동의할 수는 없지만 과거는 어쩔 수 없었다 치자. 문제는 이제 현실이고 미래다. 정말 우리의 아이들에 그 삶의 여백과 삶의 질적 가치만큼은 놓아서는 안 된다.

가수 이지상의 노래처럼 ‘무지개를 따라갔던’ 그 어린 시절은 앞으로 쉽지 않을 듯하다. 그렇지만 적어도 HOT6를 마시며 입시지옥에서 견뎌야 하는 아이들을 만들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 우리가 마을공동체를 꿈꿀 때 간과했던 의미들이 숨어 있다. 마을공동체는 단지 지역의 친화성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적 효율성의 패러다임에 의해 지배될 때 공동체의 가치는 사라지고 만다.

약국과 병원이 한가하기를 꿈꾼다. 칸칸히 약박스로 가득 채워지는 것 말고 사이사이에 시집 몇 권씩 끼워있고, 찾아오는 손님들과 천천히 수다 떨면서 약의 효능이 아니라 약의 위험성을 알려주는 그런 약사들은 안 될까. ‘피로회복제 먹지말고 천천히 사세요. 몸이 쉬라는 거 약 먹고 해결하지 말고 쉬세요’ 라고 이야기해주는 병원과 약국은 안 될까. 제발 약의 부작용을 이용하여 ‘다이어트’ 치료법을 개발하지 말고, 열심히 놀다가 넘어져 다친 아이들에게 ‘괜찮아. 저절로 해결돼. 단지 시간이 필요하지’라고 말해주는 의사는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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