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겪었을 아픔과 원망이 내가 짊어져야할 무거운 짐짝이라는 것을.

밤이 이슥해 마당으로 나왔다. 써늘한 날씨에 풀벌레 울음소리도 끊겼다. 건너편 다랑이 논에서 고라니가 크게 울었다. 아래채 민박 방 봉창은 아직 불이 켜졌고 도란도란 얘기소리가 새어나왔다. 가끔 깔깔거리는 아이들 웃음소리도 섞여 나와 내 맘까지 푸근해지는 밤이었다.

습관처럼 아궁이 불씨를 확인하고, 마당 외등을 끄고 바깥마당으로 나와 밤하늘을 보았다. 발등으로 쏟아질 것 같은 별무리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느새 겨울 별자리가 밤하늘에 가득했다. 따끔따끔 얼굴에 서리가 떨어지는 듯했다.

마당 언저리에서 팔짱을 끼고 가만히 아래채를 바라보았다. 곧 쓰러질 것 같은 집. 서까래도 많이 상했고, 지붕 기와도 곳곳이 어긋난 집. 육칠십 년은 족히 되었음직한 낡은 집. 태풍이라도 올라치면 가슴 졸이며 쳐다만 봐야하는 집. 그러나 저 집은 우리들 생계를 책임지는 보물 같은 집이었다.

▲ 김석봉 농부

“저 집을 손을 보든가 해야겠는데......” 며칠 전 민박손님들과 어울려 술잔을 돌리다 문득 저 낡은 아래채가 눈에 들어와 미안해하는 마음으로 중얼거렸다. “아니, 왜요?” 부산에서 온 손님이 불콰해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집이 좀 기운 것 같기도 하고, 돈만 있으면 확 밀어버리고 새 집을 지을 것인데...... 그러면 손님들 지내기도 편할 것이고......”

“그 무슨 말씀을. 저거 손대면 우리는 안 와요.” 마주 앉은 천안손님이 약간 술에 취한 채 손사래를 치며 끼어들었다. “왜, 저 집이 어때서요?” 술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부산손님은 여전히 정색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는 미안하지요. 그 좋은 도시 모텔도 하룻밤에 얼만데. 방에 텔레비도 없고, 화장실도 없고...... 그런 방을 비싼 돈 받고 민박을 하려니......”

“우리는 그래서 오는 데요.” 천안손님 아내가 맥주잔을 든 채 바짝 다가와 앉았다. “우리도 저 집이 좋아서 옵니다. 저런 집이 어디 있겠어요.” 부산손님 아내도 맞장구를 쳤다. “우리 집사람이 이 집 알기 전까지는 여행할 때마다 특급호텔만 묵었어요. 국내고 외국이고 특급호텔만. 그런데 처음 이 집에 오고부터 확 바뀌었어요. 이런 집에, 직접 차린 음식에, 생면부지 옆방 사람들과 어울리는 이런 것이 여행의 맛이라고. 아이들도 외갓집 오는 것처럼 좋아하고...... 이런 시골에 이런 집이 남아있는 걸 여기서 처음 봤어요.” 부산손님이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부산손님은 사업을 한다고 했다. 이 낡은 집이 좋다면서 처음 인연을 맺고 한 해에 몇 번씩 다녀갔었다. 초등학생 자녀 셋을 둔 대가족이었다. 올 때마다 아내를 위해 빵을 한가득 안고, 서하 장난감도 챙겨오곤 했다. 이 부산손님이 오는 날은 마당 고양이들 잔칫날이기도 했다.

처음 이 마을에 들어와 이 집을 만나고, 한 달도 되지 않아 이사를 와버렸다. 지리산 천왕봉을 마주하는 조망경관이 좋았고, 아직은 투박한 산촌 그대로의 마을모습이 좋았지만 어머니와 형제자매들과 내 어린 시절을 보냈음직한 저 집이 더없이 포근하게 나를 잡아당기는 거였다.

시멘트 블럭을 쌓아 지은 본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오직 아래채 저 집이었다. 이사를 오자마자 이웃마을 목수를 불러 아래채를 손보기 시작했다. 썩어 내려앉은 마루를 다시 깔았다. 창고로 쓰던 곳을 방으로 만들었다. 너덜너덜해진 흙벽을 수리하고, 하동 고령토광산에서 가져온 황토를 발랐다. 부서져나간 문살을 새로 갈아 끼우고, 기둥에 칠해진 페인트를 벗겨냈다. 그러자 그 허물어질 것 같았던 집이 눈부시게 살아나는 것이었다.

이사 온 이듬해 지리산둘레길이 우리집 곁을 지나고, 아래채 방 세 칸으로 민박을 시작했다. 그 무렵 아내도 서울생활을 끝내고 내려왔다. 가진 것 없고, 돈벌이도 마땅찮은 우리가 할 일은 민박밖에 없었다. 이웃이 내어준 자투리땅 이백 평이 농사의 전부였다.

다행이도 민박손님은 꾸준히 찾아들었다. 지금은 며느리가 되어 함께 살고 있는 보름이도 그때 민박손님으로 찾아와 아래채 작은방에 묵었었다. 나는 환경운동가, 아내는 자연음식을 배우며 여기 산골에 살고 있으니 이런저런 소문이 났고, 이름 꽤나 알려진 이들도 우리 민박집을 찾아들곤 했다.

그러자 매스컴이 가만 두지 않았다. 별별 텔레비전 제작진에서 찍자고 연락을 해왔다. 몇몇 프로그램을 받아들였는데 그때도 배경은 오직 저 아래채였다. 심지어는 저 낡은 집이 에스비에스 ‘불타는 청춘’의 무대가 되어 이름 꽤나 알려진 연예인 여럿을 품었던 적도 있었고, ‘한국기행’이나 ‘인간극장’의 무대가 되기도 했었다. 허물어져 가던 저 집이 나를 만나 호사를 누리는 것인지, 힘든 삶을 연장하는 것인지 우리는 알지 못했다.

저 집이 없었다면 우리 가족이 이 마을에 정착할 수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저 집으로 민박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집은 그야말로 적막했을 거였다. 누구도 찾아와 하룻밤 정든 얘기를 나누지도 못했을 것이고, 많이 외롭고 쓸쓸했을 거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적막을 이겨내지 못하고 다시 도시로 기어들어 가버렸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저 집이 있어 나와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아온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다른 세상을 맛볼 수 있었다. 오직 내가 사랑하고 미워한 세상만이 세상이라고 믿었던 나에게 또 다른 세상을 보여준 집이었고, 그 집을 찾아준 그들이었다. 또 다른 세상이야기를 들려준 그들이었다. 그 자영업자였고, 그 노동자였고, 그 사업가였고, 그 무명시인이었고, 그 술꾼이었고, 그 학생이었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그들로부터 듣고 보고 배웠다. 이 세상 자본이 모두 천박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진보주의자들이 꿈꾸는 세상도 욕망과 슬픔과 괴로움이 영영 걷히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내가 자랑스러워하며 쏟아낸 말과 행동이 그 누군가의 가슴을 많이도 아프게 했을 거라는 사실을. 그리고 나는 알았다. 그들이 겪었을 아픔과 원망이 결국은 내가 짊어져야할 무거운 짐짝이라는 것을.

“많이 추워졌네.” 다시 한 번 이궁이 불씨를 살펴보고 방으로 들어왔다. 뒤따라 들어온 써늘한 공기가 나를 이불 속으로 밀어 넣었다. “아래채 문 빨리 해달아야 할 텐데......”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던 아내가 쳐다보지도 않고 또 문 타령이었다. 아내는 매일같이 아래채 문 타령이었다. 마루에 미닫이문을 해 달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고, 올해 겨울이 오기 전에 꼭 해달겠노라고 약속을 했었다. 마루에 미닫이문을 달면 아래채가 한결 포근해질 것 같았다. 눈보라도 막고, 외풍도 막고, 고양이들의 접근도 막을 수 있고, 보기에도 좋을 것 같았다.

우리는 저 아래채를 더 예쁘게, 더 따뜻하게, 더 다감하게 치장해 주어야할 의무가 있었다. 그리하여 저 집과 저 집을 찾아 드는 모든 이들이 함께 아름답고 행복해지도록 가꾸어야할 책임이 있었다. “내일 남원시내 헌 문집이라도 찾아가 봐야지......” “꼭 옛날 시골 점빵집 문처럼 문살이 쫌쫌한 것으로 구해야 해요.” 낭팰세. 이 세상에 그런 문짝이 아직 남아있을까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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