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복원된 진주성을 어찌 할까요?

현재의 진주성은 1604년 쌓은 성의 내성을 모체로 복원된 것이다. 나는 현재의 내성을 볼 때마다 철저한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은 졸속 복원으로 성의 원형을 왜곡한 것에 표현할 수 없는 슬픔과 분노를 느낀다. 

진주성 복원은 박정희 군사정권시절인 1969년부터 민족성지 복원계획에 의해 시작됐다. 1972년에 촉석문 복원이 이루어졌고, 이어서 성벽의 복원이 시작되었다. 1979년부터 1984년까지는 성내의 정비를 위해 민가가 철거되고 성내에 살던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1992년부터는 성지 경관 정비를 위해 외곽 시설들이 철거되었고, 2002년 내북문(공북문)이 복원되면서 비로소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 조창래 역사진주시민모임 공동대표

그런데 복원된 진주성을 답사해 보면, 지적할 점이 한둘이 아니다. 성 돌의 처리, 여장(성가퀴)과 총안(총렬)의 상태 등 성벽 축조의 문제점에서부터 완성된 촉석문과 내북문의 모양, 텅 비어서 공원화된 성 내부에 이르기까지 지적할 부분을 손가락으로는 다 꼽을 수 없다. 그 중 백미는 성벽을 제자리가 아닌 엉뚱한 곳에 쌓아서 축소 복원한 것이다. 

문제의 복원 부분은 성의 동북쪽이다. 촉석문 바깥쪽 입구에서 성벽의 북쪽을 바라보라. 그러면 처음부터 안쪽으로 꺾여 들어간 부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성벽을 끼고 따라가다 보면 성 밖 경사면에 잔디밭을 조성해 놓은 곳에 이른다. 잔디밭 위를 바라보면 돌들이 열을 지여 둥글게 꺾여서 서쪽으로 향하고 있다. 이것은 본래 존재했던 내성의 기단부 석축이다. 내성의 정확한 위치는 여기인 것이다. 

내성의 동북쪽은 일제강점기에 도로를 내고, 도로변에 여러 시설물들을 축조하면서 지형에 많은 변형이 있었던 곳이다. 진주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현재의 40대 이후 세대들은 개인적인 추억 한가지 쯤 간직할 만한 장소로, 이곳에는 제일극장과 중앙극장이 있었다. 그 극장들을 포함해 일대에 있던 시설들이 1992년부터 시작된 성지 경관정비 사업에 의해 철거되었다. 그리고 그 일대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그만 이 석축들이 드러난 것이다. 철저한 고증 없이 이미 변형된 지형을 바탕으로 성벽을 복원해 버린 상태에서 이를 어찌해야 할 것인가…. 그나마 그 석축이라도 훼손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까…. 그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참담한 심경은 말로 표현 할 수가 없었다.

역사학계에서는 문화재 발굴의 최고 참사로 1971년에 있었던 무령왕릉의 발굴을 꼽는다. 무령왕릉은 그해 7월 장마철 어느 날 하루 밤새에 빗자루로 쓸어내듯이 뚝딱 발굴을 해치워 버려 두고두고 치욕의 발굴로 회자된다. 나는 지금의 진주성도 한국 문화재 복원史에서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 잘못된 복원의 대표적 사례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동물들과 다른 점은 역사 속의 잘못을 기억해 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는데 있다고 하지만, 작금의 우리에게 부딪혀 있는 진주성 외성 발굴과 보전에서는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는다고 과연 누가 장담할 수 있을 것인가?

[알림, 필자주] 윗글에서 주장한 진주성 축소복원에 대해 본 연구의 연구자께서 “새로운 사료의 등장에 따라 기존 주장을 철회하고 검토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내놨습니다. 이에 필자 역시 본 글에 담긴 주장을 철회합니다. 하지만 석축의 성격에 대한 규명은 여전히 필요해, 새로운 연구 성과가 나오면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독자 여러분께 혼선을 드리게 된 점 고개 숙여 사과드립니다. 

저작권자 © 단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