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사람들과 길 위에서 소박한 추억을 새기며

하늘이 열리던 날, 가족들과 개천장에 나갔다. 굳이 ‘개천장’이라고 적은 이유는 우쭐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예술축제 효시’라는 거창한 설명 없이도 개천장이라고 하면 으레 다 알아듣는, 선 굵은 역사를 우리는 지녔다고 자랑하고픈 마음. 그래서 해마다 이맘때면 아이들 손을 잡고 밤마실을 나선다.

서부시장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진주성까지 가는 동안,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한 방향으로 걸었다. 제법 쌀쌀한 가을바람에 대비해 가벼운 점퍼를 걸친 옷차림도 대개 비슷했다. 젊은 어른은 아이 손을, 아이는 다시 노인의 손을 잡고 걷는 길. 낯선 얼굴들이었지만 이 밤, 길을 나선 것만으로도 비슷한 동질감을 나눠 마신 표정들이었다.

▲ 재인 초보엄마

진주성에 도착하니 7시 30분. 김시민 장군 동상 아래에선 한 무리의 정치인들이 흰 두루마기를 맞춰 입고 인사말을 하고 있었다. 어딜 가나 주목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는 법. 그들이 내뱉는 말들이 밤공기 위로 동동 떠올랐다. 그 사이 우리는 인파 속으로 스며들 준비를 했다. 아이들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여기선 우리가 손을 잡고 움직여야 해. 서로 놓치지 않도록. 초딩 딸은 아빠 손을 꼭 쥐었으나 중딩 아들은 내 손을 자꾸만 밀쳐냈다. 대신 팔짱을 끼려 하자, 녀석이 펄쩍 뛰며 거부했다. 내심 서운했지만 참는 수밖에. 보는 눈이 많았다.

곧 불꽃놀이가 시작된다고 누군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도 어딘가에 멈추어야 했다. 강이 보이는 방향으로 갔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아예 돗자리를 펴고 앉은 사람들도 있었다. 주로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단위가 많았다. 돗자리 위에서 가만있지 못하고 폴짝폴짝 뜀박질을 하는 아이들. 이 저녁에 밖에 나온 것이 마냥 신나 보였다. 잠시 후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고 사람들 시선이 일제히 하늘로 향했다. 불덩이가 공중으로 솟구쳤다. 펑!펑!펑! 우와아. 하늘에선 불꽃이, 땅에선 탄성이 피어났다.

휴대폰을 들고 사진 찍느라 바쁜 사람, 매캐한 화약 냄새가 난다고 손으로 코와 입을 가리는 사람, 아이에게 더 가까이 보여주고 싶어 무등을 태우는 사람, 불꽃이 새로 터질 때마다 감탄하는 사람, 앞에 선 누군가에게 시야를 가리지 말라고 손짓하는 사람, 머리 위로 떨어지는 재를 털어내며 모자를 쓰는 사람, 불꽃에 정신이 팔려 남의 돗자리를 밟고 올라섰다가 슬그머니 발을 빼는 사람. 그들 속에 나도 있었다.

불꽃놀이는 10분이 채 되지 않아 끝났다. 그래도 다들 흡족해했다. 늘 보던 거라든지 시시하다는 불평 따위는 없었다. 그 이상을 바라면 욕심이란 걸 진작에 알고 있다는 듯이. 주변에서 사진 몇 장을 더 찍고는 순하게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에 섞여 우리도 왔던 길을 돌아나갔다. 흰 두루마기의 무리는 어디로 갔을까. 김시민 장군 동상 앞에서 사회자가 애타게 안내방송을 하고 있었다. 하늘색 점퍼를 입은 5살 남자 아이가 부모님을 찾고 있습니다. 아이 이름이 다시 한 번 크게 방송되었다. 가족들이 어서 이걸 듣고 나타났으면. 그들이 무사히 만나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조금씩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병목현상. 나가는 문은 좁은데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리다보니, 길이 막혔다. 천천히, 밀지 마세요, 이런 말들이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앞에서 남편이 딸아이를 챙겼다. 그런데 아들이 보이지 않았다. 놀라서 두리번거리니 뒤에서 녀석이 내 어깨를 두 손으로 잡으며 말했다. “엄마, 내가 다 보고 있으니까 천천히 가요.” 어쭈. 누가 누굴 본다는 거냐. 흐뭇하게시리. 바로 옆에서는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를 앞세워 걷고 있었다. 가자, 가자, 어여 가자... 들릴 듯 말 듯 할아버지의 노랫소리가 발밑으로 낮게 깔렸다. 키 작은 손자는 어른들 틈에서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 소리를 붙잡고 나아가고 있었다. 먼 훗날 손자는 저 노래를 기억할까. 기억나지 않아도 이 무렵이 되면 그리움이 고일 것이다. 그 옆에는 한 쌍의 연인처럼 보였는데, 둘은 내내 웃으며 소곤거렸다. “사람들이 많으니까 따뜻하다, 그치?” 키득거리는 그들의 웃음소리에 가만히 더듬어보았다. 내게도 저런 시절이 언제였더라.

사람들에 밀려서 성문을 빠져나왔다. 시원한 공기를 마시니 살 것 같았다. 불꽃놀이 잠깐 보자고 이렇게 밀리는데 나왔냐고 하면 뭐라고 하나. 가족들을 힐끗 쳐다보았다. 딸아이가 장난감 강아지를 사달라고 조르자, 남편이 작년에 샀다고 말하면서도 노점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아들은 성큼성큼 걸으며 말했다. “내년에는 친구들하고 올래요. 아까 보니까 아는 애들 몇 명 있더라고요.” 그래서 자꾸 손을 털어냈구나. 친구들이 볼까봐. 그래도 다행이다. 내년에 또 오겠다니. 그걸로 됐지. 욕심을 털어내며 집으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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