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이기심을 우선 없애자.

이 세상에 집 없는 동물이 있을까. 달팽이는 아예 집을 자랑스레 들고 다니고, 저녁이면 새들은 비좁지만 새끼를 키우기에는 모자람이 없는 둥지로 너나없이 날아간다. 들짐승 산짐승도 저마다의 굴혈이 있어서 오소리 기름을 얻으려면 입구에 나뭇단을 쌓고 불을 질러 연기를 오소리 굴집에 넣어야 한다. 길가의 비둘기도 하다못해 사람들이 만들어 준 것일지언정 산뜻한 집이 엄연히 있고 물고기들도 마찬가지로 시냇물 바위틈에 서식처가 있다. 그들이 집 문제로 죽을 때까지 고뇌하고 있다는 얘기를 나는 과문한 탓인지 아직은 들어 본 적 없다. 구름(구름도 동물이다)의 집은 드넓은 하늘이다. 집이 필요 없어 보이는 바람(바람도 동물이다)은 어떠한가. 박재삼 선생의 시 ‘천년의 바람’에서 우리가 보듯 바람은 세월을 집으로 하여 세월을 살아간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그 세월을.

▲ 박흥준 상임고문

그렇다면 “하늘 아래 집 없는 동물은 없다”가 정답이어야 하는데 그 답은 불행히도 이 땅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 한다. 찾아보니 어렵지 않게 집 없는 동물을 과연 발견할 수 있었으니, 집에서 쫓겨난 고양이와 버림받은 개들이 있었고, 하루의 고된 노동을 마치고 남의 집 한 칸을 빌어 지친 몸을 뉘어야 하는 분들이 있었다. 옛날의 봉놋방과 60년대 집단합숙소를 거쳐 도시 재개발에 온몸으로 저항하다 외곽으로 밀려난 분들이 있었고, 사글세에 보증금조차 까먹고 한겨울 길거리에 나앉아 노숙자가 된 분들이 있었다. 형태는 조금 다르지만 오늘날에도 그런 분들이 한 두 명이 아니어서 주기적으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그 가운데 한 명이 바로 나였다. 도시빈민의 어린 아들, 바로 나였다.

60년대 초반, 초등학교 3학년이던 나는 가정환경조사서를 낼 때마다 부끄러워서 어린 마음에 그냥 지구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전화기나 피아노 등등은 그 당시 또래집단에서 있는 애가 드물었으니 별 일이 아니었다. 자가(自家)인지 전세인지를 표시하는 란에 이르러서는 자못 의기양양하기도 했었다. 서울 중랑천변 무허가 집일망정 동그라미를 서슴없이 그리면 되었다. 루핑을 덮은 5-6평 남짓한 판잣집이었지만 자가임에는 분명했으니.

문제는 그 집이 철거되면서 시작됐다. 어느 날 저녁 무렵 구청 철거반이 느닷없이 들이닥쳤다. 어머니의 두 손 모은 애원을 그들은 간단히 무시했다. 허름한 판잣집의 지붕을 철거반원들은 각자의 양 손으로 순식간에 삐거걱 들어올렸다. 아버지는 노동일에서 돌아와 저녁밥상을 받고 계셨다. 흙먼지와 나무판자 부스러기가 아버지의 가난한 밥상에 무참하게 내려앉았다. 아버지는 첫 술을 뜨기 직전의 숟가락을 손에 쥔 채 앉은 자세 그대로 돌부처마냥 미동도 없으셨다.

너무 어려서였을까. 그런 상황에서도 별다른 감정변화를 겪지 않았던 나는 그 일이 있은 뒤 가정환경조사서를 작성할 때마다 살고 싶지 않아서 전전긍긍하는 철없는 아이가 되었다. 간단하게 전세 란에 동그라미를 그리면 되었을 텐데 어린 마음은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했고 결국은 마음의 동요를 감춘 채 자가 란에 동그라미를 치는 또 다른 부끄러움을 무릅써야 했다. 한 번이 어렵지 그 다음 해부터는 아무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약간의 부끄러움은 있었지만.

내 명의로 된 집을 갖게 된 건 직장인 6년차, 가정을 꾸린 지 4년쯤 뒤였다. 진주시 하대동 13평 주공아파트에 입주하는 날, 셋방살이를 벗어난 아내는 갓 태어난 둘째를 포대기로 업은 채 나를 보고 해맑게 웃었다. “사장님. 제가 집을 샀습니다아.” 회사 복도에서 사장을 마주친 몇 살 안 되는 평사원이 철없이 큰 소리로 외쳤을 때 인자하신 사장님은 “그래 그래 축하한다. 나 좀 바빠서 이만...” 달라붙은 쉬파리를 떼어내듯 계단을 그냥 내려가 버리셨는데 그러든지 말든지 나는 그날 기분이 좋아서 하루 종일 계속 벙글거렸다.

그린벨트를 풀어야 하느니 안 된다느니 하며 서울시와 국토교통부가 싱거운 입씨름을 하고 있다. 보유세를 강화하는 만큼 거래세는 낮춰서 다주택자들이 도망갈 출구를 만들어야 한다느니 어쩌니 하며 논객들이 맞서고 있다. 서울에만 집값이 오르고 지방은 아예 미분양 물량이 쌓여 있으니 이런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며 흥분하는 사람(지역 모 매체의 모 기자)도 드물게는 있는 모양이다. 노태우의 200만 채 이후 건설자본의 끊임없는 분양을 거치면서 주택보급률이 100%를 넘어선 지 오래인데도 이런 논란이 지금까지 계속되는 건 주택문제의 뿌리를 다시 찾아봐야 한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문제는 어디에 있었을까.

집값 떨어진다고 혐오시설(따지고 보면 혐오시설이 절대 아니다)이 들어서는 걸 플래카드 들며 한사코 거부하는 게 우리들이다. 장애아 학부모들을 무릎 꿇게 하는 게 우리들이다. 먼저 가졌다고 짬짜미로 집값을 올리는 데 열중하는 게 우리들이다. 종부세 인상과 공시가격 현실화를 기를 쓰고 반대하는 게 우리들이다. 아파트를 짓는 족족 온갖 편법과 불법으로 다 쓸어가 버리는 다주택자들은 그렇다 치고, 집 한 채 달랑 갖고 있어서 세금 오를 일 별로 없는 장삼이사들마저 조중동의 선동에 휩쓸려 세금폭탄을 들먹이며 거품 무는 일이 실물경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불려야 할 재산으로 우리 모두 주택을 바라보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의 주택문제는 백약이 무효이다. 그냥 답이 없다고 봐야 한다.

어른이 되기 전까지 오랜 세월 무주택자로 살았으면서도 아직도 주택문제에는 별로 아는 게 없는 나는 최근 나를 제외한 채 씽씽 돌아가는 세상이 너무 시끄러워 나도 모르게 주택문제를 한 번 생각해 보게 됐다. 그리고는 아둔한 머리를 한 달 가량 힘겹게 굴린 나머지 주택을 바라보는 사회 일반의 시각이 재산개념에서 주거개념으로 바뀌어야만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나름의 결론에 도달하게 됐다.

다주택자의 살고 있는 집을 제외한 나머지 집들을 국가가, 특별법을 만들어 과표는 조금 심하고 그냥 공시가격으로 모두 매입해 무주택자에게 저렴하게 임대분양하면 어떨까. 지금부터는 임대주택이 아니면 건축허가를 내 주지 않는 방법은 어떨까. 그렇게 해서 임대주택의 비율이 90%쯤으로 높아진 뒤 모든 임대주택을 국가가 관리하면 어떨까. 보증금 백만 원에 월 10만 원 정도 임대료를 내면 17평 아파트에서, 20만원이면 25평에서, 30만원이면 32평에서 순차적으로 집을 바꿔가며 사는 게 가능한 세상. 그런 세상을 만들면 모든 게 깔끔하게 해결되지 않을까.

하지만 혁명보다 어렵다는 개혁, 그 개혁보다 이게 더 어려울 듯싶어서 나는 다시 풀죽은 상태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래서 하나마나 한 얘기로 오늘의 결론을 내려 한다. 우리 안의 이기심을 우선 없애자. 더 가지려는 욕심도 없애자. 나아가서는 집에 관한 한 법정 스님의 무소유 이데올로기를 모두들 뇌리에 굳건히 장착하자. 아예 불가능한 일일 것 같지는 않은데...

한 10여 년 전이었던가? 임창정과 하지원이 주연을 한 영화 ‘1번가의 기적’을 보다가 어느 장면에서 나는 옆자리의 아내 몰래 흐르는 눈물을 감추느라 애썼던 기억이 있다. 철거현장을 지켜보면서 집을 빼앗긴 아이들이 목 놓아 부르던 노래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 게 새 집 다오” 장면도 아니었고, 왕년의 복싱 챔피언인 하지원의 아버지가 산동네에서 병들어 죽는 장면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 건 바로, 포크레인 삽날이 판잣집을 내리찍었을 때 할아버지와 손자들이 둘러앉은 밥상에 흙먼지가 내려앉는 장면, 바로 그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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