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수구 세력의 방해와 준동 뚫고 나아가라

“오늘 우리 두 정상은 백두에서 한라까지 아름다운 우리 강산을, 영구히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평화의 터전으로 만들어 후손에게 물려주자고 확약했습니다. … 나는 이 자리에서 지난 70년 적대를 완전히 청산하고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한 평화의 큰 걸음을 내딛자고 제안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2박3일 평양방문은 파격과 감동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동양에서 가장 크다는 능라도 5.1경기장에 운집한 15만 명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들을 상대로 한 대한민국 대통령의 연설은 특히 역사에 남을만한 일이었다. 이미 김대중, 노무현 등 2명의 남측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한 바 있지만 정상들끼리의 만남에 그친데 반해, 문재인은 북측 대중을 상대로 직접 ‘남북화해와 평화의 길’을 역설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북측 인민들의 뜨거운 호응은 ‘이전에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벌어진데 따른 전율에 가까운 감격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 최용익 전 MBC논설위원

두 정상은 서로 상대를 치켜세우는 겸양과 배려의 미덕을 아낌없이 보여주었다. 김정은이 문재인에게 “오늘의 귀중한 또 한 걸음의 전진을 위해 평양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노력에 진심어린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습니다.”하고 띄우자 문재인은 김정은에게 “담대한 여정을 결단하고 민족의 새로운 미래를 향해 뚜벅뚜벅 걷고 있는, 여러분의 지도자 김정은 위원장께 아낌없는 찬사와 박수를 보냅니다.”하고 받는 식이었다. 사소한 꼬투리를 빌미로 트집잡고 비난을 퍼붓는 속 좁은 구태를 보이면서도 제 실속을 챙기기에 바빴던 ‘적대적 공존체제’ 시절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웅숭깊은 화법이었다. 전 통일부 장관 정세현은 이를 가리켜 “함께 살아야 한다는 대목은 단순한 레토릭이 아니다”라며 “비핵화 의지, 남북관계 개선, 군사적 적대 행위 종식에 대한 확신 없이는 나올 수 없는 얘기”라고 평가했다. 평소 그다지 남북관계에 전향적이지 않던 바른미래당 최고위원 하태경도 “한반도가 새로운 시대로 대전환한다는 상징적인 사건”이며, “이 큰 변화의 물결에 우리 야당과 보수 진영도 함께해야 한다”고 야권의 전향적인 태도를 촉구했다.

<9월 평양공동선언> 5조는 “남과 북은 한반도를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평화의 터전으로 만들어나가야 하며 이를 위해 필요한 실질적인 진전을 조속히 이루어나가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고 못 박았고 ➀유관국 참관 아래 북한 동창리 엔진시험장과 미사일 발사대 영구 폐기 ➁미국이 상응 조치를 취할 경우 영변 핵시설 영구 폐기 등 추가 조치 이행 등의 합의를 천명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조선반도를 핵무기도 핵위협도 없는 평화의 땅으로 만들기 위해 적극 노력하겠다”는 김정은의 비핵화를 약속하는 첫 육성 발언이 나왔다. ‘가까운 시일 내 김정은의 서울답방’도 합의돼 평양과 서울을 오가는 남북정상회담의 정례화도 기대된다. 이번 정상회담은 비핵화의 ‘돌파구’ 마련과 더불어, 남북한 간의 70년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한반도의 ‘불가역적인 평화’를 촉진하기 위해 노력한 점이 돋보인다. 군사합의서에는 “쌍방은 어떤 경우에도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명시됐다. 사실상의 ‘남북 간 불가침선언’인 셈이다. 또 제재 해제 국면에 대비한 경제협력 기반 조성, 이산가족 상설면회소 설치 등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남북 교류를 이어가기로 했다. 탄탄한 남북 관계를 바탕으로 “민족자주와 민족자결의 원칙”(<9월 평양공동선언> 전문) 아래 북-미 관계 역시 견인하겠다는 구상이다. 남북 관계가 호전되면 북-미 관계도 따라서 진전될 수 있다는 것을 평양공동선언이 입증했다고 보는 이유다.

평양공동선언을 주도한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꺼져가던 북-미 대화의 불씨를 되살리며 다시 한 번 북-미간의 ‘유능한 중재자’로서의 역량을 과시했다. 지난 5월에도 문재인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북-미 정상회담 취소를 통보하자, 이틀 뒤 통일각에서 김정은과 두번째 정상회담을 열어 트럼프의 마음을 돌리게 하는데 관여한 바 있다. 이번에도 북-미 대화의 불씨를 살려내, 트럼프가 요청한 ‘수석 협상가’로서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셈이다. 미국 행정부도 화답하듯, 정상회담 결과를 반기며 북-미 대화 재개를 선언했다. 트럼프는 <9월 평양공동선언>에 관해 “한국에서 아주 좋은 소식이 있다. 우리는 북한과 관련해 엄청난 진전을 이루고 있다”며 김정은과 만날 것이라고 말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도 리용호 북한 외무상과 뉴욕 유엔총회에서 만날 뜻을 전하며 오스트리아 빈에서도 북-미 간 실무 대화를 시작한다는 뜻을 표시했다.

이렇게 남북한이 한마음이 되어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에 나서고 있지만, 이를 외면한 반대여론의 역풍도 감지된다. 특히 그중에서도 국내 극우수구 세력의 준동이 문제다. 이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우리만 일방적으로 무장해제했다”는 것이다. 먼저 자유한국당(이하 자유당) 등 보수당이다. 자유당 비상대책위원장 김병준은 “북핵 문제는 진전이 없고 우리 국방력은 상당히 약화시키며 정찰과 관련한 부분에서 눈을 빼버리는 상황이 걱정 된다”고 비판했다. 원내대표 김성태도 “북한은 핵을 꼭꼭 숨겨놓고 있는데 우리는 모든 전력의 무장해제를 해버리는 결과를 만들어냈다”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반대를 위한 반대’로 한반도 평화를 담보할 수는 없다. 진정한 보수정당이라면 북한이 미사일 발사기지 폐쇄와 ‘상응 조치’시 영변 핵시설 폐쇄까지 약속했으니 이제 미국도 북한의 체제 안전과 관련한 성의있는 조치를 보이라고 외쳐야 하지 않을까. 앞서 자유당은 지방선거 패배 후 기존 냉전반공주의 노선에 대해 자아비판 분위기에 젖었던 적이 있었다. 지방자치단체 선거에서 자유당이 ‘TK 자민련’으로 전락하자 원내대표 김성태는 동료위원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국민에게 사죄하는 퍼포먼스를 펼치며, “냉전과 반공주의에서 벗어나겠다”고 다짐한 것을 기억한다. 그런데도 결국은 보수 민심의 결집을 기대하는 과거의 관성으로 돌아가 버리고 만 것인가. 자유당에게 합리적 보수정당으로서의 상상력을 발휘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끝내 무리일까?

수구대열에서 조선일보가 빠질 수 없다. “김정은 ‘핵 없는’ 한마디에…공중정찰·해상훈련 포기” “서해 완충구역 황당한 불균형…사실상 ‘엔엘엘(NLL) 포기’ 논란” 등 각 면의 머리기사는 남북정상회담의 성과 깎아내리기에 여념이 없다. 사설제목도 ‘추석 밥상에서 NLL 팔아먹었다는 얘기 나오면 안 되니…’, ‘남북 정상회담 주변의 이상한 풍경들’, ‘북핵 폐기 실질 진전 뭐가 있나’ 등 <9월 평양선언>이 북한에게만 유리하고 우리에게는 불리한 것 투성이라는 식의 일방적인 비난과 저주 일색이다. 최소한의 객관적 평가도 없이 회담 흠집 내기에만 급급한 모양새다. 조선일보의 이 같은 행보는 같은 그룹으로 통칭됐던 중앙, 동아일보와도 많이 다르다. 비판을 하더라도 인정할 것은 인정하면서 비판해야 하는데 외눈박이 식의 맹목적 비난 일색이라는 게 문제다.

예를 들면 남북 간의 ‘군사합의서’에서 남북이 군사 충돌을 막기 위해 만든 완충지대를 두고 마치 남한만 국방을 포기한 것처럼 쓰는 건 형평성에 어긋나는 틀린 기사인데도 이를 밀어 붙이는 식이다. 국방부가 조목조목 반박한 세부사항보다는 큰 틀에서 이번 회담 성과를 봐야 한다. 남북 군사합의를 둘러싼 공방 자체가 근시안적이라는 말이다. 단기적인 군사력 대결 차원에서 유‧불리를 따질 것이 아니라 남북 간의 군사대결 구도 자체가 바뀌는 한반도 평화 구축이라는 큰 흐름에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주도했던 2000년 6월 15일 남북정상회담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북한에 대한 불신과 불안, 믿을 것은 미국뿐이라는 식의 편향된 기사를 양산해온 조선일보가 과거의 냉전질서가 흔들리게 됐으니 다급해졌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데는 일리가 있다.

누가 뭐라해도 <9월 평양선언>은 한반도 평화 체제를 획기적으로 앞당기는 역사적인 합의다. 그것도 세계인들이 모두 바라보는 가운데 공개적으로 진행된, 따라서 되돌리려고 해도 되돌리기가 어려운 ‘불가역적’인 평화선언이다. 북한의 지도자 김정은은 전 세계로 생중계된 기자회견에서 육성으로 비핵화 의지를 밝혔다. 이번 합의는 사실상의 불가침선언으로, 남북한은 모두 수십 년간 유령과 같이 따라다니던 전쟁 공포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마련했다. 북·미 간 비핵화 협상 등 아직도 난관은 적지 않다. 그러나 잘 풀리면 연내에 종전선언까지 끌어낼 수도 있다. 자유당 등 보수당들은 이제라도 태도를 바꿔야 한다.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결정적 시기에 전향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면 정치판에서 도태될 수도 있다. 지난 지방선거에서의 교훈을 잊었는가. 평상시에 조용하던 민심의 역린을 건드리면 성난 쓰나미로 돌변해 모든 것을 쓸어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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