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진주성 변천사 연구해온 김준형 경상대 역사교육학과 교수

진주성광장 부지에서 진주성 외성벽 일부 구간이 발견된 가운데 학계와 시민단체는 이번 발견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발견된 외성벽이 과거 진주성 외성이 지나가던 길을 추측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사료가 될 것이라 판단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이번에 발견된 외성벽의 하단부 축조시기가 드러나면 하단부 축조시기와 상단부 축조시기 사람들이 살았던 생활면(생활하던 땅의 높이)의 차이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될 것이란 기대가 나온다. 발견된 외성벽의 상단부와 하단부는 축조방식이 달라보였다. 상단부의 경우 일제강점기 당시의 것으로 의견이 좁혀지고 있는 가운데 하단부의 축조시기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 김준형 경상대 역사교육학과 교수. 그는 진주성 변천사 연구의 권위자이다.

단디뉴스는 13일 그간 진주성의 변천과 관련해 심도깊은 연구를 해온 김준형 경상대 역사교육학과 교수를 만났다. 그는 이번 발견에 대해 “진주성 외성이 있었다는 걸 모르는 진주시민들이 많았는데 이번 발견으로 진주성 외성의 존재를 많은 시민들이 알게 될 것 같다”며 “한편으로는 진주성 외성이 존재하던 곳을 좀 더 정확히 알 수 있게 될 것 같다”는 기대감을 나타냈다.

그는 이어 “차후에 외성 전체를 복원하면 좋겠지만 엄청난 비용과 시간이 든다”며 외성 일부만이라도 보존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진주성 전투 당시 가장 치열한 전투가 일어났던 진주성 동문의 복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현재의 진주성은 복원 당시 역사적 고증을 거치지 않아 돌 모양이 사각져 있는데, 이건 옛날 성벽의 모습이 아니다.”고 설명했다. 

김준형 교수와 함께 만난 송영진 경상대박물관 학예사는 발견된 외성벽의 하단부 축조시기를 밝히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상단부는 일제강점기 이후의 성벽이 분명해 보이지만 하단부는 아직 잘 모른다”며 “하단부 축조 시기를 알게 되면 하단부 축조 당시와 일제강점기 당시 사람들의 생활면(높이) 차이를 알 수 있게 된다”고 설명했다. 

 

▲ 김준형 경상대 역사교육학과 교수가 추정해 그린 진주성 변천도

다음은 김준형 경상대 역사교육학과 교수와의 일문일답

- 진주성 외성벽 일부가 발견됐다.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일단 진주지역 사람들이 지금 현재의 진주성만 알고 있지, 외성이 있었다는 걸 잘 모른다. 진주성 외성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본다.”

- 진주성 내성이 임진왜란 때는 없었다고 들었다.
“그렇다. (진주성 그림을 보며) 보자. 임진왜란 때는 내성이 없었다. 조선후기인 1603년 당시 경상우병영이 마산에서 진주로 옮겨오면서 우병사로 부임한 이수일이 내성을 축조했다. 내성에는 관공서가 많았고 외성 쪽에는 민가들이 많았다.”

- 시대에 따라 진주성의 모습이 좀 다르다. 
“조선 초기에는 좀 작았고, 임진왜란 당시는 꽤 커졌다. 그러다가 이수일이 성이 너무 길어 방어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 그 규모를 좀 줄이게 된 거다. 그때 안쪽으로 벽이 하나 더 생기며 내성과 외성의 구분이 생긴 거다. 

- 그 외에는 진주성 형태가 변한 적 없나?
“여러번 수축을 하기는 했는데 전체적인 큰 틀에서는 변화가 없었다. 조선 숙종, 정조 때도 수축을 하긴 했다.”

- 외성 복원의 필요성을 강조해온 걸로 안다. 외성 전체 복원이 필요하다고 보나?
“외성 전체를 복원하면 좋기야 좋겠는데, 엄청난 비용과 시간이 걸릴 거다. 외성 터에 고층건물이 많이 들어섰다. 반발이 일어날 거다. 외성 전체를 복원한다고 하더라도 임진왜란 당시의 성을 복원하기는 힘들다. 당시 어디에 어떤 건물이 있었는지 모른다. 조선 후기 진주성 복원은 가능하다. 내부시설들에 대한 자료가 남아 있다. 하지만 내가 주장하는 건 일부만이라도 복원하자는 거다. 임진왜란 당시 가장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진 동문, 조선후기의 동쪽 끝이랄 수 있는 동장대 정도. 이런 것들을 복원하면 임진왜란 때는 진주성이 여기까지, 조선후기는 여기까지 있었던 걸 알 수 있을 거다. 특히 동문 쪽이 있던 곳은 발굴해보면 여러 유물들이 나올 거다. 그리고 진주성내에 있던 경상우병영 자리도 복원해야 한다.”

- 복원사업이 진행되려면 어떠한 형식으로든 전문가가 참여하는 복원사업추진위가 필요할 것 같다. 
“그렇다. 진주성뿐만 아니라 원시가지 전체의 경관과 관련해 종합적인 방향을 논의하기 위해 전문가들, 역사학자들이 참여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진주시와 시민단체도 참여해야 한다. 급하게 서두르지 않고 차분히 진행할 필요가 있다.”

- 지금 진주성은 박정희 시대에 복원된 걸로 안다. 어떤 시대를 모델로 한 건가?
“어떤 시대를 모델로 했다고 보기 힘들다. 현재성은 구릉지역을 대상으로 해서 성을 쌓았다. 내성 부분만 복원했다. 전체성을 복원해야 하는데..”

- 당시 복원에 문제가 있었다고 하던데?
“옛날 모습으로 복원해야 하는데 성벽 돌을 네모나게 깍아서 쌓았다. 자세히 보면 다른 부분이 조금 있다. 그건 옛날 성벽의 모습이다. 아무튼 제대로 고증을 하지 않고 복원하면서 문제가 생긴 걸로 안다.”

 

▲ 진주성 외성벽이 발견되면서 이를 견학하고 있는 시민들의 모습

- 이번에 발견된 외성벽의 일부가 훼손돼 있다. 
“그 곳뿐만 아니라 다른 부분도 많이 훼손됐을 거다. 건물을 지으면서 지하까지 파곤 하니까. 그래도 이번 발견으로 외성의 위치가 어느 정도 나왔다. 외성이 지나던 길을 추측할 수 있을 거다. 외성이 지나던 길을 표시할 수 있을 거다. 중요한 건 발견된 외성벽을 어떻게 보존할까 하는 거다. 이것만이라도 제대로 보존해야 한다.”

- 어떻게 보존됐으면 좋겠나?
“발견된 외성벽 앞 쪽에 둑처럼 흙이 쌓여져 있다. 이걸 허물어서 예전에 남문에서 배타러 나오는 길도 복원했으면 한다. 남문은 진주교에서 원시가지쪽으로 넘어오면 있는 사거리 쪽에 있었다. 이걸 복원하려면 강 쪽에 있는 길도 허물어야 한다. 이걸 어떻게 처리할 지가 문제이다. 그리고 지금 발견된 외성벽의 지대가 낫다. 비가 오면 물이 차서 문제가 될 수 있다. 성벽 쪽에 유리판을 설치해 비가 안 들어가게 하고 사람들이 들어가 볼 수 있게 한다거나 하는 조치가 필요하다. 성벽을 옮긴다는 건 문제가 있다. ”

- 외성 발견 현장에서 앞쪽(도로 쪽)으로 튀어나온 외성벽 일부도 발견됐다.
“그 부분이 논란거리다. 그 실체가 궁금하다. 진주성도를 보면 툭 튀어나온 부분이 있다. 이것과 관련이 있는 건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이걸 확인하려면 강쪽으로 땅을 더 파봐야 한다. 지금 발굴지역이 아니라고 그대로 뒀는데 파봐야 한다.”

- 유럽의 경우 성벽을 그냥 자연 그대로 방치도 해두던데?
“ 그렇게 되면 물에 잠기게 될 거다. 물이 차면 성벽이 허물어지게 될 거다.” 

- 이번에 발견된 외성벽이 진주의 랜드마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유등축제 때나 이럴 때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이 있을까?
“그대로 두는 것 외에 다른 방안은 없다. 제가 진주성 변천사를 추측해 그렸지 않나. 그걸 살펴보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성의 변천에 대해 더 확실하게 얘기할 수 있게 될 거다. 내가 그린 성의 변화가 틀렸을 수도 있다. 발굴팀에게도 발굴 과정에서 해자가 나올 지도 모른다고 발굴을 잘 해달라고 부탁했다.”

다음은 송영진 경상대박물관 학예사와의 일문일답

- 발견된 외성벽의 상단부와 하단부 모습이 좀 다르다.
“상단부는 일제강점기 이후의 (외성) 성벽이 분명해보인다. 하단부는 언제인지 시기를 밝히는 게 중요하다. 하단부는 조선전기의 성벽(임진왜란 당시)으로 추정하는데, 만약 그렇다면 조선 전기 당시의 생활면과 이후의 생활면(높이)이 차이가 나는 거다. 하단부가 쌓였을 때는 다소 아래쪽에서 살았고, 상단부가 쌓였을 때는 흙이 퇴적되면서 위쪽에서 살았다는 게 된다.”   

- 결국 높낮이의 이야기인데 중요한 이야기인가?
“성벽을 복원할 때 이전부터 이야기됐던 어느 시기의 성을 복원할 것인가에 있어 중요한 문제가 된다. 미묘한 차이지만(1m정도 수준) 생활면(높이)에 차이가 있어 성벽 하단부의 축조시기를 밝혀내는 건 중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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