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세월 성벽을 지킨 흙더미 보다 사람이 나아야 하지 않겠나

족히 100년은 땅 속에 묻혀 있었을 돌들이 밝은 태양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그저 돌무더기만 나와도 고마울텐데, 쌓아 올릴 당시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위풍당당한 자태였다.

이야기로만 그림으로만 보아오던 진주성 외성의 실체를 눈앞에 마주하고 보니 벅찬 감격에 전율이 올랐다.

진주성 역사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제가 ‘거열성’이란 이름의 토성을 지은 것이 시초다. 이후 1379년 고려 우왕 때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돌로 다시 쌓았고, 우리가 익히 아는 임진왜란까지 수차례 걸쳐 왜군을 막아내는 역할을 감내했다. 처음엔 내성만 있었지만 선조 24년(1591년)에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김수(金睟)가 외성을 쌓아 보강했다. 이번에 발굴된 외성의 하부구조는 당시 축조된 원형일 가능성이 높다.

▲ 서성룡 편집장

임진왜란으로 외성의 일부가 무너지고 훼손됐는데, 발굴된 성벽엔 왜란 이후 보수한 흔적들이 역력했다. 계사년에 무너진 성벽을 추스르고 다듬어 쌓아올린 선인들의 굵은 힘줄이 서려 있는 듯, 흘린 땀방울이라도 묻어 있는 듯 바윗돌 하나 하나가 귀하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 흙 한줌에도 역사가 있다’는 문화유산답사기의 한 구절이 빈말이 아님을 저 돌들이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긴 세월 축축하고 컴컴한 땅 속에서 잘 견뎌준 돌들 하나하나가 반갑고 고맙다. 성벽을 보호라도 하듯 고이 지켜준 흙무더기도 고맙다. 옛 것을 쉬이 허물지 않고 곱게 흙을 덮어 삶의 터전으로 삼은 선인들의 아끼는 마음이 느껴진다.

곧장 허물고 파고 부수고 새로 짓기를 좋아하는 오늘날의 포악하고 값싼 건축 건설 문화가 새삼 부끄러워진다. 말하고 보니 두려워진다. 전광석화처럼 결정해서 전쟁처럼 뚝딱 ‘복원사업’을 해치울까봐서. 제발 바라건데 이제는 그러지 말자.

고을 주(州)자가 들어간 천년 고도(古都)라는 진주에 그만큼 세월의 때를 만날 수 있는 곳이 과연 어딘가. 몇몇 복원된 절터나 거기에 위태로이 선 돌탑 몇 개, 산기슭 무덤이나 비석 몇 개가 고작이다.

시민들 성금으로 지은 금성초등학교를 단박에 허물고 백화점을 지은 도시. 역사적인 형평운동 회합 장소로 쓰인 진주극장은 대리석 껍데기로 치장한 쇼핑몰을 세우고 겨우 표지석 하나 놓았다. 박정희 시절 새마을운동처럼 했다는 진주성 복원도 실상을 들여다 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정사각형 반듯하게 깍은 성돌은 본래의 맛과 멋을 버렸고, 화포 구멍도 아래쪽이 아닌 수평으로 뚫어 허술한 고증을 드러낸다. 1960년에 복원한 촉석루 하부 기둥도 원래는 나무였으나 돌로 만들어 치명적인 오점으로 남았다.

이번에 발굴된 진주성 외성은 확연히 달랐다. 지대석과 기단석, 그 위에 쌓아올린 성돌의 크기가 저마다 달라 각기 다른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먼저 쌓아올린 아래쪽과 임진년 이후 개축한 위쪽도 확연히 구분돼 성벽 하나에 지나온 역사가 그대로 아로새겨 있다.

발굴 현장에는 부끄럽고 아픈 상처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비교적 최근에 지어졌다 흔적 없이 사라진 실크 전시관 터에서 성벽을 크게 훼손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나온 것이다. 아프지만 그 또한 개발독재와 경제 우월주의가 낳은 부끄러운 상처요, 역사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외성 터를 파낸 자리에 자동차 400대를 댈 지하주차장을 짓겠다는 전 진주시장의 억측과 고집, 그에 편승했던 잘난 개발론자들의 흰소리가 쏙 들어갔다는 것이다.

11일 공개한 발굴현장에서 나온 어느 교수의 말대로 성급한 복원 보다는 ‘그대로’ 보존하는 일이 지금은 더 시급하고 중요하다. 오랜 세월 성벽을 고이 덮고 있던 흙더미 보다야 사람이 나아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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