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자는 감옥으로, 피해자는 일상으로

그 소식이 들려 온 것은 국가 지정 기념일로 지정된 후 첫 번째 ‘위안부 기림의 날’을 맞아 시청에서 성명서를 발표하고 돌아온 직후였다. 단체 회원들과 함께 차를 마시던 중 무심코 살펴보던 휴대전화에서 ‘무죄’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 말 그대로 ‘경악’했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전시 성폭력 문제의 조속한 해결(이미 너무 늦었지만)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돌아와 앉아 있는 우리들의 가슴에 또 하나의 돌덩이가 얹히는 느낌이었다.

기사를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과 감정이 마음속을 스쳐 지나갔다. ‘우리나라의 사법부가 권력을 가진 수많은 성폭력 가해자들에게 보란 듯이 면죄부를 주는구나.’라는 생각과 분노, ‘이제 말하기 시작한 성폭력 피해자들이 다시 위축되어 입을 닫으면 어떡하지’라는 걱정과 불안감.

▲ 강문순 칼럼니스트

집에 돌아와 재판부의 판결 선고문과 이에 대한 기사들을 살펴보니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첫째, 도지사와 비서라는 관계가 위력이 있는 관계이기는 하나 구체적인 성폭력의 상황에서 위력이 사용된 것은 입증되지 않았다. 둘째 피해자는 ‘성적 자기 결정권’을 사용할 수 있는 성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용하지 않았다. 셋째, 피해자는 재판부가 생각하는 ‘피해자다움’에 적합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이 이유들을 읽으면서 재판부가 피해자와 우리 국민들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결국 한마디로 ‘당신이 피해자가 되지 말았어야 하고 피해자가 되었다면 자신의 일을 빨리 포기했어야 한다, 즉 그런 피해를 당했다면 생계나 자신의 꿈이나 모든 것을 버리고 일을 그만두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판부가 든 위의 세 가지 이유를 보면서 재판부가 성폭력 피해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폭력 피해자의 심리에 대한 이해, 위력에 대한 해석, 성적 자기 결정권이라는 권리에 대한 해석, 그리고 고정관념화 되어 있는 ‘피해자다움’에 대한 생각들이 지나치게 편협하고 과거에 머물러 있다.

재판부는 안희정 캠프 혹은 충남도청 조직 내에 위력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성폭력 당시에 위력이 행사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위력의 존재와 위력의 행사를 구분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조직 내에 존재하는 위력은 조직 내 상하 관계에서 일상적으로 작용되고 행사가 이루어진다. 위력은 “이 행위에 응하지 않으면 너를 해고하겠다” 라는 구체적인 말이나 협박이나 폭행과 같은 행동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위력은 권력을 가진 사람이 굳이 행사하지 않아도 ‘합리적 이성’을 가진 성인 남녀의 판단과 행위를 위축시키는 효과를 가지는 힘이다.

성적자기결정권이라는 권리에 대해서도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성적자기결정권이 자신의 권리를 침해하는 사람의 눈앞에 들이밀면 물러가는 마패나 부적 같은 것인가? 성적자기결정권은 타인에게 침해받아서는 안 되는 인간으로서의 권리이다. 그러므로 성적자기결정권이라는 것을 기준으로 하려면 가해자에게 왜 타인의 성적자기결정권을 침해했는지 물어야 하는 것이지 피해자에게 “너 그거 갖고 있었는데 왜 안 흔들었어?” 라고 물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재판부는 또 피해자가 성폭력 사건이 있은 후 ‘피해자답게’ 행동하지 않았으므로 성폭력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모든 피해자가 한 가지 방식으로 대응해야 하는가, ‘피해자다움’의 기준은 누가 결정하는 것인가를 묻고 싶다. 피해자는 피해를 당하면 모든 일상을 접고 사건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비탄에 잠겨 있을 것이라는 통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이며 이 통념은 사실인가? 내가 만나 본 성폭력 피해자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성폭력 피해자들은 피해 당시에 생각과 몸이 마비된 것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그리고 사건 이후에는 그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을 한다. 그 노력은 한 가지 방식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 상황 속에 들어간 자신을 탓하거나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자신을 이해시키거나 일에 몰두함으로써 상황과 관계를 개선시키려고 노력하거나... 자신의 업무에 더욱 매진하는 것도 그 여러 방식 중의 하나이다. 피해자의 행동이 재판부가 가진 편협한 ‘피해자다움’에서 벗어난다고 성폭력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피해자에게 가하는 또 다른 폭력일 뿐이다.

게다가 판결 이유로 제시된 3가지 기준을 바탕으로 재판을 한다면서 재판부의 시선은 줄곧 피해자에게로 향해 있다. 가해자가 판결 이유에 해당하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에게 왜 그랬냐고 묻는 것이다. 이 재판에 대한 많은 기사들이 기사와 논평들이 ‘이 재판은 안희정 재판이 아니라 김지은 재판’ 이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선고문에서 재판부는 재판은 성인지감수성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 선고문에서는 성인지감수성이 적용된 대목을 찾을 수 없었다. 이제부터라도 재판부가 주장하는 것처럼 성인지감수성을 바탕으로 하는 재판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사회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우리가 마지막으로 기대는 언덕, 즉 법을 제대로 운영하여 이제 말하기 시작한 미투 피해자들에게 법이 당신들을 보호하고 지지한다고 말해주어야 한다. 범죄자는 감옥으로, 피해자는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사회의 정의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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