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흥준 칼럼] 우리도 난민이었다

그들에게 인간이 되자 박흥준l승인2018.08.05l수정2018.08.07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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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떠나는 순간 우리는 모두 난민이다. 전쟁을 피해 먼 땅을 찾아나서든, 먹을 게 없어 도시빈민으로 편입하든 난민이 되는 순간부터는 내일을 기약하지 못 한다. 고단한 몸 누일 방 한 칸 없고 우여곡절 끝에 한 끼를 먹으면 다음 한 끼는 저 멀리 있어서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항상 긴장해야 하고 배고파 울부짖는 자식 아가리에 옥수수 한 알이라도 넣어주려면 우리는 마지막에는 도둑질이라도 해야 한다. 사흘 굶어 담 넘지 않을 사람 없다고 했다. 오늘 맞아 죽어도, 내일 굶어 죽어도 후손은 살아야 했다. 우리도 난민이었다.

되놈 지주에게 어린 딸을 맡기고 돈 몇 푼 빌어 한겨울을 났다. 허리띠 졸라 황무지를 개간했다. 뼈 빠지게 소작을 지은 뒤 생산한 작물의 거의 모두를 가지고 딸을 찾으러 간 우리는 엄청난 돈을 더 갖고 오라는 되놈의 가슴팍에 낫을 꽂아 넣었다. 삶이 뿌리째 뽑히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내 아내 내 자식이 어디서 무얼 하는지, 살아 있기나 하는 건지 모르는 채 만주 땅 누우런 흙먼지에 기진하여 해골을 묻었다. 우리도 난민이었다.

▲ 박흥준

포성이 은은하게 귓전을 울리는 새벽. 꽹과리와 징소리가 곧바로 들이닥칠 듯 하여 우리는 마음이 급했다. 폭격에 부서져 강 바닥에 쑤셔박힌 철교의 잔해. 짙푸른 물결이 모든 걸 삼킬 듯 넘실대는 바로 위에서 벌벌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지탱해 한 발 한 발 옮겨 디뎠다. 피란보따리 울러매고 자식놈 손 꼭 쥐고 조심하라 소리치며 살을 에는 추위도 느끼지 못 한 채 우리는 겨울강을 건너 남쪽으로 향했다. 공산당도 무서웠지만 더 무서운 건 맥아더였다. 원자폭탄이 떨어질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기에. 죽지 않으려면 남쪽으로 가야 했다. 나는 죽더라도 성씨는 보존해야 했기에 우리는 남쪽으로 가야 했다. 우리도 난민이었다.

중앙선 완행열차. 돈을 아끼느라 우리는 역마다 들이밀어지는 김밥을 외면하고 찐 감자 한 알로 허기를 달래며 상행선을 느릿느릿 기었다. 등이 휘도록 지겟짐을 지고 비지땀을 흘리며 리어카를 끌더라도 우리는 서울로 가야 했다. 조출철야(早出徹夜)를 밥 먹듯 하고 기계에 잘린 손가락이 팔딱팔딱 뛰더라도 우리는 가야 했다. 고향을 등지는 건 살 길이 막연해서이지 더 나은 삶을 꿈꾸어서가 아니었다. 아니, 더 나은 삶이 있기는 한 걸까. 더 이상 살 수 없어 서울로 왔는데 서울도 참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도 난민이었다.

난민인 우리들. 우리의 아이들. 낯설고 물 설은 땅에 정착해 그래도 지금껏 숨을 쉬고 있는 것은 그렇게 스며든 곳에 드물게나마 인간이 있어서였다. 대다수 순혈주의자들이 우리를 타매(唾罵)하고 굶든 죽든 아예 쳐다보지도 않을 때, 우리를 동네 똥개처럼 사갈시(蛇蝎視)할 때 그래도 우리를 불쌍히 여겨 먹을 것을 나누고 일자리를 내 준 사람들이 가끔은 있었다. 자신들도 가난하면서 가진 것을 조금씩 떼어내 오갈 데 없는 우리를 돌본 그들. 그들은 인간이었다. 우리는 다행히 인간을 만난 난민이었다.

수많은 가신 분들의 노력과 희생이 가져 온 것인지, 박정희 개발독재의 결과인지 우리는 지금 경제규모 세계 10권의 나라를 이루었고 그런 대로 잘 짜인 사회질서 속에서 프로야구와 프리미어리그를 즐기며, 늦은 밤 편의점 캔맥에 목젖을 적시며 살고 있다. 전쟁의 공포 또한 옅어지고 있고 어느 순간 선진국으로 분류되면서 GDP를 감안했을 때는 몇 푼 되지는 않지만 우리보다 어려운 외국에 어쨌든 원조도 하는 나라가 되었다. 물론 노동자들은 아직도 저임금의 족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소상공인들이 모처럼 단일대오를 이루어 최저임금을 위협하고, 청년취업이 큰 문제가 되고는 있지만 당장 밥을 굶거나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은 아니다. 난민의 후손인 우리들이 한 번쯤 주변을 돌아볼 정도는 됐다는 얘기이다.

예멘 난민 5백여 명이 제주도에 왔다. 내전으로 삶의 뿌리가 뽑힌 그들이 예전의 우리처럼 전쟁과 굶주림을 피해, 살 길을 찾아 돌고 돌아 도착한 곳이 바로 대한민국. 난민협약에 가입한 국가, 대한민국이다. 우여곡절을 거쳐 대한민국에 왔으나 냉담과 적대에 몸을 움츠리며 살려고 몸부림치는 그들이다. 예전의 우리처럼. 우리는 손을 뻗어 그들의 손을 잡아야 한다. 예전에 우리의 이웃이 우리의 손을 잡았듯이. 먹고 살 길만 있다면 그들은 우리를 위협하지 않는다. 우리가 나누기만 하면 그들은 우리의 다정한 이웃이 된다. 이 땅의 생산에 기여하고 문화를 풍부하게 하며 우리를 깨우치기도 할 그들이다. 나라경제에 난민이 반드시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오히려 경제가 원만히 돌아가고 성장률을 높이는 데 도움을 준 사례도 지구촌 곳곳에서 발견된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난민심사가 한창이다. 물론 심사는 엄격해야 한다. 아울러 정확해야 한다. 엄격하지만 정확한 심사로 난민인정률을 획기적으로 높여야 한다. 그들 모두를 난민으로 인정한다면 세계가 한 번 더 우리를 주목할 것이다. 촛불항쟁에 주목했던 것처럼. 대한민국을 드높이는 일은 이제 환경을 파괴하고 도시를 빚더미에 올리는 잠시만의 올림픽이 아니라 이러한 난민문제를 포함한 인권문제에서 찾아야 한다. 인권선진국이 돼야 진정한 선진국이다. 남민전의 홍세화 선생도 난민이었다. 광주항쟁의 윤한봉 선생도 난민이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상해 임시정부의 김구 선생도 오갈 데 없는 난민이었다. 우리도 예전에는 난민이었다.

우리 모두 그들에게 인간이 되자. 그들의 조국이 안정을 되찾고 그들이 다시 조국으로 돌아갈 때 “잊지 않겠노라” 울먹이며 말할 수 있도록. 먼 훗날 예멘에서 월드컵이 열릴 때 태극기를 손에 쥐고 운동장을 찾아온 그들과 형제처럼 얼싸안을 수 있도록.


박흥준  840039par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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