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고우면하는 김명수 사법부는 심판주체로 부적절하다

그동안 밝히기를 꺼려해 온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사법 농단’ 의혹과 관련한 문건 196건이 공개됐다. 그러나 아직도 상고법원 설치 로비대상이었던 20대 국회의원의 성향과 관련 재판 진행상황을 정리한 내용 등 민감한 부분은 공개하지 않고 있다. 검찰의 ‘부산 법조비리 은폐 의혹’ 관련 자료 제출 요청도 다시 거부됐다. 하지만 나온 것만 가지고도 양승태 사법부의 정세분석과 정보취합, 대응전략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양승태가 법원행정처를 동원해 청와대 등 소위 힘깨나 쓰는 사회 요로에 뻗친 손길은 상상을 초월했다. 국회와 언론, 변호사 단체 등은 물론 심지어 행정부처인 외교부 등에 까지 온갖 형태의 로비와 영향력 행사를 위해 전방위로 대응책을 마련했다. 양승태의 수족이 되어 움직인 법원행정처는 마치 삼성그룹의 ‘비서실’이나 ‘미래전략실’같은 사법부 내의 정보기관 역할을 맡았다. 그만큼 조직적이고 치밀했다. 상고법원이 뭐길래 명색이 삼권분립의 한 축인 사법부가 이런 막장 행태를 보였는지 알 수 없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 본다.

“당 내부의 복잡한 기류. 계파별 온도차. 친노 대 비노”,

“야당 내 분위기에 대한 냉철한 점검과 계파별 온도차를 이용한 투 트랙 전략 필요”.

정당 내부의 전략보고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법원행정처가 작성한 문건에 적시된 것들이다. 한명숙 전 총리에 대한 대법원 판결 이후 유죄 선고를 두고 ‘야당 탄압’ 주장이 쏟아지자, 상고법원 도입에 미칠 파장 등을 따지기 위해 야당 내부의 계파 분석을 시도한 것이다.

▲ 최용익 전 MBC논설위원

상고법원 반대론자인 정의당 서기호 의원에게는 서 의원이 ‘법관 재임용 탈락을 취소해달라’며 낸 소송의 변론을 종결해 ‘심리적 압박’을 가하는 방안이 나왔다. 다른 의원들에 대해서도 대법관, 고법 부장판사 등 고위법관과 전관 변호사들을 로비스트로 활용하려 한 것으로 드러났다. 2015년 5월쯤에는 더불어민주당 전병헌 전 의원을 통해 19대 국회 법사위 간사였던 같은 당의 ‘친문 실세’ 전해철 의원을 설득하려는 방안도 세웠다. 모두 양승태 대법원의 일선 재판 관여나 사법행정권 남용 정황을 뒷받침하는 내용이다.

압권 중 하나는 대언론 로비다. 언론사 홍보를 기획한 내용 중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최대 메이저 언론” 조선일보를 집중 공략 대상으로 설정하고 변호사 상대 설문조사, 좌담회, 칼럼과 기고문 게재 등을 구상한 것으로 나타났다. 2015년 9월 작성한 ‘조선일보 보도 요청사항’ 문건을 보면, “국민들로부터 가장 신뢰를 받는 최고의 언론사를 통한 정확한 정보 제공과 쟁점 부각이 가장 효과적인 방안”이라고 썼다. 검찰의 수사 결과, 양승태의 법원행정처는 방상훈 조선일보 대표의 사돈인 이인수 전 수원대 총장의 형사사건 진행상황을 지속적으로 관리해 왔으며, 전국 법원에서 진행 중인 조선일보 관련 민사사건에 대해서도 일괄 조사했다. 그동안 법조계에서는 방상훈과 특수관계인 이인수를 정권이 봐주고 있다는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문건은 반면에 “한겨레, 경향 등의 진보 계층에 대한 여론조성 기능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며 “상고법원을 원색적으로 비판하는 기사 등이 노출되지 않도록 방어적 홍보활동을 병행할 필요가 있다”고 진보언론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는 모습도 보였다.

양승태의 ‘사법농단’ 사태가 불거진 지 6개월이 다 돼간다. 그런데 가면 갈수록 가관인데다, 파면 팔수록 고구마 줄기처럼 새로운 사실이 끝없이 나온다. 양승태 등 사법농단을 주도한 일군의 법조 귀족들의 행태가 점입가경인 것이다. 도대체 상고법원이 뭐길래 양승태는 대법원장의 탈을 쓰고, 정보기관원과 교활한 장사꾼의 이중인격을 유지해온 것일까?

양승태의 사법부가 저지른 일련의 탈법적이며, 상식을 뛰어넘는 ‘사법농단’ 사태는 한국의 사법부 역사를 뒤흔드는 초유의 참사로 기록될 것이 확실하다. 사법부가 독재 정권의 폭압으로 인해 독립성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던 때는 많이 있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절차적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기 전, 서슬퍼런 독재정권에 밉보인 법관은 미행을 당했고 정보부에 끌려가기도 했으며 재임명에서 탈락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때는 적어도 일부 법관들이 정권에 저항했고, 시민사회의 지지가 보태지면서 힘겹게나마 사법부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것도 사실이다. 이른바 ‘사법파동’이다. 그런데 이번의 ‘양승태 사태’는 그 성격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다. 바깥에서의 압력이 아니라 내부에서 대법원장 양승태를 필두로 법원행정처의 소위 엘리트 판사라는 자들이 사법부를 통째로 정치권력에 헌납한 것이다. 유신독재 정권이나 전두환의 5공 독재 하에서도 사법부의 수장이라는 대법원장이 법원행정처를 동원해 스스로 사법권을 갖다 바친 일은 없었다. 따라서 이것은 명백한 헌정질서 유린이자 국기문란 행위다.

정의와 인권의 보루인 사법부를 지키기 위해 필요하다면 목숨까지 걸어야 할 자들이, 일신의 안위와 입신양명을 위해 서슴지 않고 대의를 저버린 참변 앞에 국민은 망연자실하고 있다. 양승태와 그 아류들이 ‘사법부의 독립’을 정권에 내어준 행위가 1910년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은 이완용 등 민족 반역자들의 그것에 비해, 다른 점이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것은 김명수 현 대법원장의 뜨뜻미지근한 태도다. 김명수는 지난 두 달간 “재판거래는 없었다”면서 특조단이 확보한 문건의 공개를 주저해왔다. 지난 5월, 특조단 보고서를 공개하면서도 문건 원본은 공개하지 않다가 비판이 일자 98건을 공개했지만 나머지 파일에 대해서는 “재판 독립이나 사법행정권 남용과는 무관하다”고 피해왔다. 전국법관대표회의가 “미공개 파일의 원문을 공개하라”고 의결하자 마지못해 남은 자료를 공개하면서도 민감한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제20대 국회의원 분석’ 문건이 대표적이다.

이번 문건 공개도 최근 양승태와 박병대 등의 집과 사무실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법원이 기각하자, ‘특별재판부’ 도입 여론이 높아진 데 대한 대응 성격이 짙다. ‘사법농단 사태의 몸통’인 양승태 등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과 통신내역 영장을 잇따라 기각해 왔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양승태를 정점으로 한 일종의 조직적 범죄인 ‘사법농단 사태’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개인의 일탈행위로 몰아간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는다. ‘꼬리자르기’라는 말이다.

결국 ‘사법농단 사태’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 ‘특별재판부’ 설립 입법 작업이 시급하다. 기존의 사법행정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사법농단과 관련된 영장을 심사하고, 또 이 시스템을 통해 구성된 재판부에서 판결이 이뤄지게 될 경우 절차적 투명성과 결과의 공정성이 담보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미 심판 자격을 상실한 기존의 사법부가 재판의 주체가 될 경우, 그 재판의 공정성과 독립성이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겠는가. 국회는 신속하게 ‘특별재판부’ 설립을 중심으로 하는 입법 작업에 나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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