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씨와 박씨는 범죄자이다. 노동자가 숨조차 쉬지 못하게 만들었으니.

봉산탈춤과 수영야류, 가산오광대의 공통점은? 당대의 지배층인 ‘양반놈’의 허위의식을 풍자하고 그들의 이중적 행태를 조롱하며 끝내는 그들을 연희(演戲)라는 무기로 까부수는 민중의 서사(敍事)가 그 줄거리라는 데 있다.

조선 8도 어디에도 탈춤이 없던 곳은 없었으며 ‘양반놈’들도 기분은 매우 지저분했으되 웬 만큼의 희롱은 분을 삭이며 마지못해 허용했다. 노골적인 패설(悖說)에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으면 가끔은 잡아다 볼기를 치기도 했지만 마당에서 한 번 놀도록 한 뒤 밥은 먹여서 보냄으로써 혹시 있을지 모를 후환(後患)에 대비하는 조심성은 있었다.

세월이 흐른 뒤 그들의 후손인 항공사 노동자들이 탈을 쓰고 나옴으로써 민중은 궁극적으로 살아남았다. 민중이 적(敵)과 대치할 때 제일 먼저 장착했던 최종병기 탈, 그들의 얼굴을 가려주는 페르소나(persona,탈)는 그래서 소중하다.

그리 길지 않은 삶에서 우리는 몇 개의 페르소나를 가질까. 먼저 유년기에는 귀여운 짓을 일부러 하거나 앙앙 울어대는 것으로 부모의 관심을 계속 유지하려는 페르소나를 썼고 소년기에는 용돈 혹은 칭찬을 획득하려고 착하고 말 잘 듣는 아이의 페르소나를 꺼냈다. 청년기에는 당대의 조류에 익사하지 않으려고 잘 알지도 못 하는 이념의 선봉에 서기도 하고 회의론과 개인주의로 몸을 둘러싸 자신을 방어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나이를 먹었다.

▲ 박흥준

서른이 넘어 사회인이 되면 페르소나는 다양하게 진화한다. 직장상사의 말도 안 되는 횡포에 일단은 다소곳한 페르소나가 절대 필요하다. 동료들 사이에서 왕따를 당하지 않으려면 마음을 감추고 그들과 어울리려는 둥글둥글한 페르소나를 써야 한다. 부모에게는 효도 페르소나가, 배우자에게는 성실한 생활인의 페르소나가, 자녀에게는 자상한 부모의 페르소나가, 후배에게는 자신이 꼰대가 절대 아니라고 설득하는 애처롭기 짝이 없는 페르소나가 필요하다.

페르소나를 쓰는 건 일단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 끊임없이 노력해야만 페르소나는 페르소나의 가치를 가질 수 있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분석하고 권력자가 누구인지 살펴야 하며 그 결과로 꺼내든 페르소나가 과연 제 역할을 하고는 있는지도 수시로 의심해야 한다. 권력자 역시 자신의 페르소나를 쓴다고 봐야 하기에 그런 점까지 감안해 결정하고 행동해야 한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싸움은 이렇게 지난하다.

자신을 지키기도 하지만 페르소나는 자신을 파괴하기도 한다. 오랜 세월 페르소나에 의존하다 보니 어느 순간 우리는 우리가 아니게 되어버렸다. 우리의 페르소나를 어정쩡하게 받아들인 그들은 페르소나 너머의 우리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 하며 우리가 아닌 그 어떤 것이 그들의 눈에 비치는 바람에 우리는 더 이상 우리를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우리를 지키려고 페르소나를 꺼내들었지만 그 페르소나가 역으로 우리를 파괴하는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권력자라면 문제는 심각한 상황으로 치달아 자아를 피폐하게 하고 세상을 불안하게 만든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노동자들이 경영진 퇴진을 요구하는 집회를 하고 있다. 그들의 갑질은 상상을 초월했고 시민들은 경악했다. 저 스마트한 제복 너머에 저렇게 무서운 지옥이 있었다니. 견디다 못한 노동자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는데 왜 이제야 나왔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조씨와 박씨의 횡포는 필설(筆舌)로 형언(形言)하기가 불가능한 경지를 자랑하고 있다. 그런데 노동자들이 탈(가면)을 쓰고 있다. 촛불을 경험한 시민들은 처음에는 의아해 하다가 뒤늦게 알아차린다. 아. 지난 시절의 권력자보다 사주가 더 무섭구나.

시민들은 그러면서 걱정한다. 저 엉성한 가면이 저들을 보호할 수 있을까. 집회현장 사이사이에 회사의 간자(間者)들이 촘촘히 박혀 있을 터인데 가면이 과연 제 구실을 할까. 페르소나는 부당한 권력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장치인데 저들의 페르소나는 부실하기 짝이 없구나. 이 삼복더위에 저 두터운(?) 가면은 사람을 지키기는커녕 흐르는 땀을 더 흐르게 하고 숨 쉬는 것조차 더 힘들게 하지는 않을까.

연극에서 나온 용어, 페르소나는 현대인의 삶과 심리, 행동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매우 유용한 개념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수십 개의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원초적 자아)을 지키기 위해 상황에 맞을 것으로 생각되는 페르소나를 그때그때 꺼내 쓴다. 항공사 노동자들의 페르소나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페르소나를 쓰는데 그들은 이 순간 눈에 띄는 무거운 페르소나를 애처롭게 쓰고 있는 게 다를 뿐.

페르소나는 자아를 지키는 방식이다. 인격이 존중되지 않는 사회에서 페르소나는 필수품이자 최종병기이다. 설령 지키려는 자아가 페르소나를 씀으로써 결국은 상실되고 말더라도 일단은 페르소나를 써야 한다. 당장은 숨을 쉬기 위해서이다. 조씨와 박씨는 범죄자이다. 노동자가 숨조차 쉬지 못하게 만들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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