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고 있으면 마음의 습기까지 확 날아간 느낌

 

클래식 음악사에서 보면 “황제”란 표제가 붙은 음악이 몇 개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요제프 하이든의 현악 사중주 “황제”와 베토벤의 피아노협주곡 제 5번 “황제”다. 하이든의 곡은 2악장에서 지금 독일의 국가에도 쓰이는 황제찬가의 멜로디가 있어서, 베토벤의 곡은 그 음악의 당당함 때문에 황제라는 칭호가 붙었다.

최근 러시아월드컵에서 한국과 독일의 경기 전 독일 국가가 연주될 때 이 멜로디를 들을 수 있었다. 가뜩이나 장마로 굽굽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요즈음 딱 어울리는 곡이 생각났다. 이렇게 눅눅한 날씨에 그나마 이런 맑고 영롱한 음악은 도움이 좀 되지 않을까?

클래식음악에 빠져서 카세트 테이프로 듣던 시절, 몇 대 협주곡이니 뭐니 하는 소리에 홀려 사게 됐던 음반. 사실 표지 사진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가장 먼저 손이 갔던 음반이다. 하지만 내게 있어선 그 어떤 베토벤 "황제"협주곡도 이 연주만 못하다.

Deutsche Grammophon에선 아직도 이 음반에 관한 한 다른 곡과 커플링 없이 딱 한 곡으로, 그것도 2만 원에 가까운 가격으로 팔고 있다. 연주 시간은 채 40분을 넘지 않는다. 요즘 CD엔 거의 80분이 넘는 음악도 넣을 수 있는데 그런 경제성 면에서 따지자면 낙제점을 줄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이것 때문에 이 음반을 사지 않는다면 커다란 즐거움을 하나쯤은 포기하게 되는 셈이다.

그렇다. 난 정말 오랜동안 이 즐거움을 애써 무시하고 살았었다. 거의 30여년이 지나고서야 그 하나의 즐거움을 되찾게 된 셈이다. 힘이 넘치지만 더없이 서정적인 폴리니의 황금같은 시절의 터치와 카를 뵘의 노익장이 이런 환상적인 결과를 만들어 냈을 것이다. 그리고 빈 필의 소리는 이들을 더 환상적인 커플로 만들어주지 않았을까? 폴리니와 뵘의 베토벤 협주곡 프로젝트는 끝내 다 이루지 못한 것은 그저 아쉬울 뿐이다.

내가 이 음반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가 또 하나 있다. 하지만 아주 엉뚱한 이유라 사람들은 비웃을 지도 모른다. 미켈란젤리가 "침묵보다 고요한 음악"이라 말했던 아주 명상적인 2악장이 지나고 3악장의 힘을 쏟는 부분에서 갑자기 폴리니 기합소리가 들린다. 내가 이 음반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다.

제 아무리 폴리니의 스승 미켈란젤리의 유명한 몇 몇 녹음들과 요즘 쏟아지는 명연들이 있다지만 난 이게 최고다. 듣고 있으니 마음의 습기까지 확 날아간 느낌이다.

* 앨범은 '베토벤의 황제' , 루디비히 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제5번 '황제' - 비엔나필, 카를 뵘 지휘, 마우리키오 폴리니 피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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