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와 MBC의 이사를 국민이 뽑아야 하는 이유

공영방송의 이사진 선임시기(KBS와 MBC는 8월 말, EBS는 9월 말)가 다가오면서 해묵은 숙제가 다시 제기되고 있다. 정치권의 압력으로부터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이사들을 어떻게 뽑아야 할 것인가의 문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이명박과 박근혜 등 2명의 전직 대통령 시절만 돌아봐도 정치권의 공영방송에 대한 인식은 ‘정권의 전리품’ 수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언제든 정권의 입맛에 맞는 방송 내용을 생산해낼 수 있는 ‘말 잘 듣는 심부름꾼’을 사장과 시사, 보도부문의 수장 자리에 앉혀놓아야 안심해 온 것이 역대 정권의 생리다.

독재정권 시절부터 생성돼온 이런 관행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이른바 민주 정부-의 10년간 약화되는 듯 했다. 주의할 것은 이 기간 중에도 청와대와 국회 등 권력기관의 방송에 대한 간섭과 개입이 없어졌던 것은 아니고, 이런 저런 방식으로 계속됐다는 점에서는 다름이 없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말이다. 이명박근혜 정부 시기는 양식있는 공영방송 종사자들에게 중세 암흑시기에 비견될 수 있다. 여러 차례 지적됐지만 이명박은 취임 첫 해인 2008년 MBC PD수첩의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성‘ 보도로 집권 초기부터 위기에 몰린다. 2달 여 동안, 전국적으로 수백만 명의 시민들이 몰려나와 수입주권과 방역주권을 미국에 헌납하려 한 이명박 정권에 대한 규탄이 이어지면서 지지율은 한자리 수로 떨어졌다. 이 사태를 계기로 이명박 정권은 MBC와 KBS 등 공영방송을 틀어쥐는 것이야말로 정권 유지의 핵심과제임을 깨닫고(?) 공영방송 장악작전에 돌입하게 된다. 그 이후의 경과는 잘 알려진 그대로다.

▲ 최용익 전 MBC논설위원

정치권의 지명을 받은 자들이 직접 KBS의 이사나 MBC의 방문진 이사로 임명되는 현재의 방식을 어떻게든 시민들이 통제할 수 있는 체제로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이유다. 정치권력을 포함한 모든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공영방송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상징하는 사건을 하나 소개한다.

지난 2007년 무렵, 법률사무소 김앤장을 두고 경향신문의 자매주간지와 KBS의 탐사보도프로그램 〈시사기획 쌈〉이 약 한 달여의 시차를 두고 보도한 적이 있었다. 김앤장은 ‘법조계의 삼성’으로 불리는 한국 최대의 로펌으로 사회정의 실현과 인권옹호라는 변호사의 기본윤리보다는 온갖 인맥과 연고를 동원해 소송에서 이기는 것을 최우선적인 가치로 삼는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재벌기업과 외국투기자본의 법률대리를 주로 맡으면서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들의 입장은 철저하게 외면한다는 것이다.

 

“경향신문사의 주간지 〈주간경향〉의 전신(前身) 〈뉴스메이커〉는 2006년 12월 12일자 커버스토리로 ‘집중해부, 김&장-론스타 커넥션’을 보도했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기사가 나가기 전에 김앤장에서 담당기자와 데스크를 만나 기사를 빼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뉴스메이커〉는 예정대로 기사를 내보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김앤장에서 선임한 언론전담 변호사는 정정보도와 사과문 게재를 요구하면서 10억 대의 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다고 겁을 줬다. 회사 재정형편이 취약한 〈뉴스메이커〉는 김앤장의 사실상 협박을 견디지 못하고 손을 들었다. 취재기자는 사표를 냈고, 김앤장이 요구한대로 정정보도와 더불어 “김&장 법률사무소 관계자들의 명예에 손상을 끼친 것에 대해 유감을 표명합니다”라고 사과했다. 언론사로서는 치욕적인 행보를 보인 것이다.

반면 KBS 탐사보도팀은 대조적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김앤장을 취재하던 〈시사기획 쌈〉팀의 취재기자에게 김앤장은 경향신문과 똑같은 식으로 방송 불방을 요구했다. 하지만 KBS는 흔들리지 않고 2007년 1월 15일(‘김앤장을 말한다, 또 하나의 권력인가?’)과 1월 22일(‘김앤장을 말한다, 남겨진 선택’) 등 2회에 걸쳐서 김앤장을 해부하는 탐사보도 프로그램을 내보냈다. 이 프로그램은 2007년 말 한국방송대상을 수상했다. 김앤장은 소송으로 가는 대신 작전을 바꾸었다. 계산에 밝은 김앤장은 소송으로 갈 경우 손해가 더 클 것이라고 판단했음이 틀림없다. 취재팀을 찾은 언론담당 변호사는 인터넷 홈페이지에 있는 프로그램 자료 중 김앤장 대표인 김영무 변호사가 한 해 600억 원의 소득을 번다는 내용이라도 빼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KBS는 그마저도 거절했다.” (<<법률사무소 김앤장>>, 임종인-장화식, 2008)

경향신문과 KBS의 가장 큰 차이는 언론사의 규모와 사회적 영향력에서 찾을 수 있다. 취재기자의 기사를 보도해야한다는 의지에서는 두 언론사 모두 비슷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경향신문사는 “김앤장의 위협이 명백히 언론탄압이고 횡포지만, 소송으로 먹고사는 김앤장에게 이기기 힘들다”고 판단했고 더욱이 10억 대의 손해배상을 당할 경우 회사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기 때문에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경향신문과 한겨레는 한국 언론가운데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편에 서는 소위 진보적인 매체로 분류된다. 진보의 목소리가 보수, 혹은 수구의 그것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은 한국 사회에서 이 신문들은 존재 자체가 귀중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신문들의 영향력은 제한적이다. 이유야 어쨌든 수구족벌신문동맹인 조중동이 만들어내는 담론과 프레임이 여론형성과정에 미치는 영향력의 크기와 비교할 때 힘이 많이 부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이렇게 왜곡, 편향된 한국사회의 담론구조를 감안할 때 KBS와 MBC 등 공영방송의 중요성은 두드러진다.

공영방송 이사들이 자신을 지명해 준 정당의 거수기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현 방송법의 문제점을 대통령이 지적한 뒤, 방송통신위원회가 바빠졌다. 공영방송 이사 중 3분의 1을 여야가 아닌 중립지대 이사진으로 구성하고 이사진 임기 교차제 및 연임 제한 등을 방송법 개정안에 넣겠다고 한 것이다. 청와대와 시민단체들의 눈치만 보고 있던 방통위가 졸속으로 내놓은 안이다. 방통위의 안은 ‘정치권이 공영방송 이사 추천권을 갖는다’는 정치권이 가진 기존의 시각에서 달라진 것이 전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방통위원 자신들이 여야당으로부터 임명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정치권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한계가 명백한 것이다.

공영방송에 대한 정치권의 입김을 차단하려면 시민이 직접 분야별 전문가를 뽑아 공영방송 이사진으로 보내고, 규모도 현행보다 대폭 확대해 정치권에서 공영방송으로 직접 연결되는 고리를 끊어야 한다. 또 현재 이사 개인당 연봉 1억 원에 가까운 보수와 각종 특혜를 없앰으로써 공영방송 이사직이 특권이 아닌 사회적 봉사의 기회로 쓰여야 한다. 모범적 사례가 독일의 공영방송이다. 교육, 과학, 예술, 노동 등 각계를 대표하는 60여명으로 구성돼 있는 독일 ZDF 이사들은 무보수 명예직으로 일하고 있다. 이사회 이름도 근사하게 ‘방송의회’라고 불린다.

단언컨대 공영방송 이사진의 선임 방식이 바뀌지 않을 경우 10~15년 뒤(현행 헌법이 유지될 경우), KBS와 MBC에는 다시 지난 2009년에 이명박이 감행했던 공영방송 장악작전-미디어법 날치기 통과, 공영방송 사장 등에 대한 낙하산 인사, 종편 창출 등-과 유사한 살풍경이 되풀이 될 것이다. 우리 국민은 특정 정파가 10~15년 이상 집권하도록 놔두지 않았다는 것이 역사적 경험이기 때문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되풀이되는 ‘공영방송을 둘러싼 복수전 시리즈’를 이제는 졸업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이효성 방송통신위원장은 ‘방송의회’의 정지작업 하나만 제대로 해놓고 나가도 역사에 이름이 남을 텐데 이런 사실을 모르는지, 알면서도 눈치 볼 곳이 많아서 그런지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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