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습니다. 깨우쳐 주셔서.

나라를 통째로 넘기시겠습니까.

그러렵니다. 그게 가능하다면 말이지요. 이번 지방선거에서 당신들이 전패하면 그렇게 된다는 뜻으로 이해되는데 당신들에게는 그 순간 좀 안 된 일이겠지만 당신들이 전패함으로써 나라가 그 어떤 곳으로 통째로 넘어간다면 그건 당신들까지도 포함해 모두에게 좋은 일이지요. 오매불망 좋은 일이지요. 수 천 년 투쟁의 역사에서 끝내 이루지 못 한 꿈이 드디어 현실이 되는 것인데 안 좋을 게 뭐 있습니까. 당신들조차도 원점에서 새롭게 제대로 시작할 수 있으니 좋은 일이지요. 그야말로 남강물이 춤을 추고 진주성 비탈의 나무들이 기쁨을 주체하지 못 해 일제히 전율할 일 아닙니까. 그러렵니다. 나라를 통째로 넘기렵니다. 그게 가능하다면 말이지요.

우리들은 오랜 세월 조선조 노비였습니다. 양반의 탐욕에 몸을 짓이기고 그들의 방향 없는 행패에 가련한 목숨 부지하느라 전전긍긍했습니다. 법률이 시행되지 않는 곳에서, 아니 엉터리 법률이 판을 치는 공간에서 한 없이 빨리고 멍석말이를 당하고 목숨을 잃고 강간을 당했습니다. 죽지 않을 만큼만 대궁밥을 먹었고 죽으면 그냥 둘둘 말려 시구문 밖으로 내쳐졌습니다. 사는 동안에는 이름이 없었고 죽어서는 무덤조차 없었던 세월. 그 고통과 체념의 세월이 이번 지방선거로 통째로 바뀐다구요? 그게 정말입니까?

우리들은 오랜 세월 개.돼지였습니다. 끓어오르다가 식었고 분노하다가 잠잠해졌습니다. 하루 세 끼 밥이 우선이었고 자식새끼 가르치는 게 그것보다 더 우선이었습니다. 분노는 분노에 그쳤고 지루한 일상은 여전히 계속됐습니다. 자식 역시 개.돼지로 키워졌지요. 체념을 기르던 세월이었습니다. 주는 대로 먹다가 체념을 달관으로 착각한 채 병든 몸을 소리 없이 땅에 뉘였습니다. 가끔은 당신들의 주장에 동조해 노조를 비난하기도 했고 철천지 원수 북한과는 상종도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최저임금을 밑도는 노동의 댓가에도 고마워 했습니다. 우리들은 오랜 세월 개.돼지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지방선거가 그런 일상을 종식시킨다구요? 개.돼지였던 우리가 인간으로 우뚝 서게 된다구요? 그게 정말입니까?

▲ 박흥준

우리들은 오랜 세월 일하는 기계였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기계가 됐습니다. 기름칠을 제 때 해 주지 않아 삐걱거리며 돌아가는 기계였습니다. 관절이 오고 근골격계가 망가졌습니다. 내일의 건강한 노동을 예비할 그 어떤 여유도 주어지지 않아서 삶이 닳을 대로 닳았습니다. 잠시잠깐 드라마를 보고 어쩌다 한 번 야구장을 찾았습니다. 피곤한 몸에 기름 대신 쓴 소주를 들이붓고 깍두기를 씹었습니다. 만신창이가 된 몸을 억지로 일으켜 밥벌이에 나서는 아침. 그 정도라도 목숨을 부지하게 해 주는 노동이 고마워 다른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짤리지 않으면 안심했고 명절 상여금 몇 푼에 마음의 여유를 가장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지방선거가 그런 일상을 일거에 종식시킨다구요? 넉넉한 기름이 우리에게 부어지고 임금이라는 이름의 동력이 배가돼 기계를 돌리고 남은 여분을 저마다 즐기게 된다구요? 인간으로 우뚝 서게 된다구요? 그게 정말입니까?

나라를 통째로 넘기시겠습니까.

그러렵니다. 그게 가능하다면 말이지요. 일한 만큼 합당한 댓가를 받고, 노조를 해도 탄압이 없고, 대학을 다니지 않았어도 차별받지 않고, 학원 가지 않고 소설책만 읽어도 자아를 얼마든지 실현할 수 있는 곳으로 나라를 통째로 넘기렵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이 실현되고, 아예 비정규직이 없어지고, 갑질도 없고, 경제외적 강제란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나라를 통째로 넘기렵니다. 전쟁의 위험이 없고, 무기거래에 따른 착취도 없고, 웃음과 평화와 건강과 배려가 넘치는 곳으로 나라를 통째로 넘기렵니다.

그러고 보니 당신들이 고맙다는 생각도 듭니다. 어쩌면 모를 뻔 했습니다. 이번 지방선거의 진정한 의미를 말이지요. 당신들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이번에도 대충 넘어갈 뻔 했습니다. 언 놈이 되든 무슨 상관이야. 그 놈이 그 놈이지. 투표권이 아까워서라도 투표는 해야지. 그럼 우리 동네 당을 찍는 거지 뭐. 지역주의 지역주의 하지만 지역주의에 안 빠진 놈 있으면 나와 봐. 뭐 이런 식으로 그동안 투표를 하거나 말거나 하면서 살아왔거든요. 그런데 당신들이 깨우쳐 주셨습니다. 이번 지방선거가 그렇게 중요한 일이라니. 정신이 번쩍 드네요. 고맙습니다.

나라를 통째로 넘기시겠습니까. 그래요. 나라를 통째로 넘기렵니다. 그게 가능하다면 말이지요. 한 번 더 정말 고맙습니다. 깨우쳐 주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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