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정치를 펼치는 민자당 세상에서 국민들은 노무현 등의 가치를 알아보았을까.

우중충한 하늘에선 가느다란 빗줄기가 흩날렸다. 망설임은 짧았다. 닷새 만에 석갑산을 바라본다. 새로운 길을 알아내었기에 더욱 설렜다. 주말 보내면서 찌뿌드드하던 몸에서 먼저 신호를 보내온다.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 뒷동산도 명색 산이라고...

통틀어 ‘소나무’라고 불러도 될까 싶은 나무들이 반긴다. 밑둥과 바늘처럼 뾰족한 잎을 보아하니 분명 소나무다. 그런데 소나무꽃은 제각각 다르다. 좀 기다란 놈, 바나나처럼 생긴 놈, 그 둘을 합해 놓은 것처럼 생긴 놈, 비슷하면서도 다른 놈... 이건 어릴 적부터 보던 소나무는 아니다. 외국산일까. 외국산이라면 어느 나라에서 들여왔을까.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데 문제는 없을까. 시답잖은 공상을 해 본다. 재선충에게는 이길까. 쓸데없는 잡념이 잠시 머릿속에 들어앉는다.

저마다 제 이름이 따로 있을 것이련만,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소나무는 사람에게 늘 유익한 것이라는 믿음으로 빙그레 웃어줄 뿐이다. 소나무의 효능을 찾아보니 백여 가지 질병에 이롭단다. 만병통치약이다. 솔잎은 추석 앞두고 떡을 찔 때 쓴다. 송편은 우리 겨레 누구나 좋아하는 떡이다. 소나무는 건축 재료로 요긴하다. 송진은 광택제나 접착제의 재료가 된다. 태워서 최고급 먹을 만들기도 한다. 송진 가루는 운동선수의 손이나 무대 바닥 등의 미끄럼 방지제로도 쓰인단다. 송이버섯을 비롯해 소나무에서 생겨나는 버섯도 여러 종류이고 그 효능도 다양한 듯한데 일일이 다 알지 못한다. 소나무가 갖고 있는, 아니 소나무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정서는 이러한 이로움보다는 훨씬 크고 높고 깊다.

고산 윤선도는 <오우가>에서 솔을 일러, “더우면 꽃 피고 추우면 잎 지거늘/ 솔아 너는 어찌 눈서리를 모르느냐/ 구천(九泉)에 뿌리 곧은 줄 그로하여 아노라.”라며 눈서리를 모르는 솔의 불굴(不屈)을 노래했다. 소나무는 장수의 상징으로 십장생 중 하나다. 대나무와 소나무가 십장생의 하나가 된 것은 그것들이 눈서리를 업신여기기 때문이라고 한다. 선비들의 필수 덕목으로 치는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겨울이 되어야 소나무 푸른 줄 안다’는 속담이 있다. 한자로는 ‘歲寒後知松靑’이라고 쓰는 모양인데 낯설다. 나뭇잎이 모두 다 떨어지고 추운 겨울이 된 뒤에야 소나무만 홀로 푸르게 건재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서리가 내려야 국화의 절개를 안다’는 말도 있다고 한다. 둘 다 ‘위급하거나 어려운 경우를 당해 보아야 비로소 그 사람의 진가를 알 수 있다’는 뜻이다.

▲ 이우기 칼럼니스트

날마다 만나고 날마다 함께 술 마시는 친구가 있다. 둘은 서로 막역지우라고 여겼다. 어느날 한 친구가 늦은 밤에 찾아왔다. 다급한 목소리로 하소연한다. “내가 어찌어찌하다가 사람을 죽였네. 지금 경찰이 날 잡으러 올 듯하니 좀 숨겨주게.” 하지만 평소 간까지 꺼내줄 듯하던 친구는 냉정하게 말한다. “현행범을 숨겨주면 나도 무사하지 못할 텐데. 미안하지만 얼른 다른 데로 가보게. 여기 왔다 갔다는 말은 하지도 말고.” 친구는 한숨을 쉰다. 너나들이로 지내던 지난 세월은 모두 겉껍데기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여러 판본이 전한다. 아들의 교우관계를 시험해 보기 위해 아버지가 짐짓 거짓 연극을 꾸민 데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아들은 아버지 앞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반면 아버지도 똑같은 상황을 만들어 친구 집에 달려가 하소연한다. “여보게 친구, 날 좀 숨겨주게.”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니, 자네가 그럴 사람이 아니잖은가?”라며 잽싸게 숨겨준다. 이를 지켜본 아들은 깨닫는다. ‘진정한 친구란 과연 무엇인가?’

내가 많은 돈을 호주머니에 넣어 다니며 술과 밥을 아무에게나 잘 사 주면 주변에 흰웃음을 지으며 달려드는 무리가 많을 것이다. 면전에서 온갖 달콤한 말을 다 할 것이다. 간이나 쓸개라도 꺼내어 줄 듯한 표정을 지을 것이다. 그들의 속마음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하고 흥청망청 술과 안주로 세월만 보내다 보면 나중에 어떻게 될 것인가. 정말 내가 위기에 빠졌을 때 진정으로 나를 구해주기 위해 나서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 그 사람이 진정한 친구인지 아닌지는 내가 위험한 상황, 어려운 지경에 놓였을 때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법이다.

알록달록 아름다운 봄꽃들이 피어나는 시절, 소나무는 거무튀튀한 색깔을 하고 있다. 모질고 추운 지난겨울을 이겨낸 영광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연둣빛 잎사귀들이 초록으로 바뀌고 녹음이 우거지는 여름 동안에도 소나무의 존재감은 나타나지 않는다. 가을이 되어 울긋불긋 단풍이 들기 시작하면 소나무는 더욱 초라해진다. 봄, 여름 동안 제법 푸른 빛을 띠던 솔잎도 검은 빛을 더 많이 머금게 된다.

그리고 겨울. 온 세상이 하얀 눈에 뒤덮인 날이 온다. 화려한 빛깔을 뽐내던 봄날의 꽃들도, 봄꽃보다 더 붉던 가을날의 단풍도 사라진 세상에서 오로지 푸른 빛을 띠는 것은 소나무와 대나무뿐이다. 모든 나무들이 앙상한 가지를 찬바람에 내맡긴 채 오들오들 떨고 있을 때 오로지 소나무와 대나무만이 푸른 것을 대표한다. 봄, 여름, 가을 동안 업신여김을 당하고 멸시를 당하면서도 꿋꿋이 버텨낸 대가를 비로소 되돌려 받는 것이다.

1987년 노태우가 6.29선언을 했다. 들불처럼 번지던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에 항복한 것이다. 하지만 12월 대통령선거에서 김영삼, 김대중이 단일화하라는 국민적 여망을 무시한 결과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된다. 1990년 김영삼과 김종필은 노태우 밑에 기어들어가 민주자유당을 만들었다. 평생 민주화 투쟁을 해오던 김영삼은 오로지 대통령 한번 해먹기 위해 인생 자체를 송두리째 배신한 것이다. 김영삼의 졸개들이 줄래줄래 따라갔다. 평소 자신의 이념이나 정치적 신념 따위는 헌신짝 버리듯 했다.

노무현을 비롯한 몇 명만 남아 꼬마민주당을 지켰다. 온 세상이 민자당 판이었다. 김영삼을 따라가지 않은 노무현, 김정길, 이기택, 김상현, 이철, 홍사덕 등 정치인들은 고난의 세월을 겪었다. 날치기 통과, 반대파 억압, 사회운동 탄압 등 독재정치를 펼치는 민자당 세상에서 국민들은 노무현 등의 가치를 알아보았을까.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라는 시조가 있다. 내 몸이 죽어 소나무가 되었다가 온 세상에 잡것들, 무뢰배, 민족반역자들이 득세할 때 홀로 푸르러갈 것이라는, 선비의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시조다. 노무현 등의 세력이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온 세상을 뒤덮고 제 잘났다고 설치는 백설이 누군지는 알겠다. 그 민자당이 신한국당, 한나라당, 새누리당, 자유한국당으로 이어지고 있다. 하도 자주 바꾸어서 순서대로 외우지도 못하겠다. 이름이 많이 바뀐 건 민주당도 똑같다.

며칠 전 유홍준 교수가 쓴 <추사 김정희>를 샀다. 아직 다 읽지는 않았다. 김정희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추사체’이고, 그다음은 ‘세한도’이다. 김정희는 1840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지위와 권력을 박탈당하고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김정희는 유배지에서 사제 간의 의리를 잊지 않고 두 번씩이나 북경에서 귀한 책을 구해다 준 제자 역관 이상적에게 1844년 답례로 ‘세한도’를 그려 주었다. 김정희는 ‘세한도’ 그림에서 이상적의 인품을 ‘날씨가 추워진 뒤에 가장 늦게 낙엽 지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하여 표현하였다고 한다.

구름 잔뜩 낀 날 오후다. 잇몸은 간질간질하고 발바닥은 근질근질하며 머릿속은 어질어질한 그런 날이다. 우람하게 키가 큰 소나무도 아니고, 어느 무덤가에 멋들어지게 드러누운 소나무도 아니고, ‘세한도’에 나옴 직한 고풍스럽고 지조 높아 보이는 소나무도 아닌, 그저 여러 종류 가운데 하나일 뿐인 소나무를 보고 여러 가지 잡생각을 이어 붙여 보았다. 소나무 같은 인생을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하다가, 부끄러워 혼자 멋쩍게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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