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인드 컨트롤’이라는 말이 있다. 국립국어원은 우리말로 ‘심리 통제, 심리 제어, 심리 조절’로 바꿔 쓰라고 한다. ‘마음 통제, 마음 제어, 마음 조절’이라고 해도 될 듯하다. 보통 때는 이 말을 잘 쓰지 않는다. 큰 시험장에 앉았을 때, 결혼식장에 신랑 또는 신부로 섰을 때, 재판정에 피고로 앉았을 때 마음 조절이 필요할 것이다. 우황청심환이 필요한 순간이 우리들의 인생에는 여러 차례 생기는 법이다. 마음 조절은 치과에 갈 때도 필요한 일이다.

4월 11일 오전 10시경 치과에 갔다. 왼쪽 윗잇몸(상악동)에 인공뼈를 넣는 수술을 받기 위해서다. 지난 1월 15일 망가진 이 여섯 개를 한꺼번에 빼고(사랑니 포함 그 전부터 뺀 것을 다 치면 10개는 될 것이다), 한 달 뒤 2월 15일쯤 달아나버린 어금니를 대신할 틀니를 맞추었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3월 15일쯤 틀니를 보수하면서 본격적인 수술 날짜를 조절했다. 조절이라고 할 것도 없다. 내가 마음먹고 찾아가면 되는 거였다.

▲ 이우기 칼럼니스트

그 사이 이런 저런 일들이 많았다. 일들이라고 했지만 별것도 아니다. 잇몸 수술을 하고 나면 한동안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뜻대로 못하게 될 것이어서 이래저래 시일을 가늠한 것이다. 되도록 술을 피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지난 석 달 동안 밥벌이와 연관되는 모임에도 나갔고 친구들의 모임에도 얼굴을 내밀었다. 마치 오랫동안 먼 길 떠나는 자의 심정으로 작별 아닌 작별을 한 셈이다. 집에서도 막걸리 한두 잔씩 했다.

대충 정리가 되었고 당분간은 피치 못하게 술을 마셔야 할 일은 없겠다 싶어 지난주에 치과에 연락했다. 4월 9일 월요일 치과에 가서 수술 전후로 먹어야 할 약 처방을 받았다. 의사는 간단하게 상담해 주었다. 진지한 듯하면서도 눙치는 듯하고 그런가 하면 필요한 사항과 상황을 조목조목 이야기해 주는 의사 선생님에 대한 신뢰는 큰 위로가 되었다. 석갑산 갔다 오는 길에, 언제 다시 가게 될지 모르는 ‘숙자네’에서 섞음국수 한 그릇 먹었다. 맛있었다.

꿈을 꾸었다. 내가 다니던 치과가 훤했다. 의사 선생님도 간호사 선생님들도 등장했다. 나는 치과 의자에 드러누워 있었고 그들은 두런두런, 소곤소곤 뭐라고 이야기했다. 꽤 긴 시간이 흐른 듯한데 뭐가 잘못됐는지 잘됐는지도 모른 채 나는 누워 있었다. 눈을 감고 있다고 여겼는데도 내 옆 의자에 앉은 사람 얼굴이 보였다. 낯익은 듯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랬다. 이윽고 의사 선생님이 “잘 됐어요!”라고 외쳤다. 잠에서 깨었다. 한숨이 나왔다.

4월 10일, 다음날 하루 휴가를 내겠다고 보고했다. 오전 10시쯤 수술을 시작하면 최대 서너 시간은 걸리는 데다, 후유증으로 퉁퉁 붓거나 멍이 들거나 코피가 나거나 하여간 오후에 출근하여 업무를 볼 수 없겠다 싶어서이다. 그런 보고를 하고 휴가를 내면서도 머릿속은 복잡했다. 뒤통수가 아프고 혈압이 오르는 듯했다. 심장이 쫄깃거리고 가슴은 두근거렸다. “입 안에 경승용차 한 대가 들었네요.”라며 건네는 농담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퇴근 후 다시 석갑산에 올랐다. 한두 번 오른 곳이 아닌 데도 이날은 전혀 다른 산으로 보였다. 짧게는 한두 해, 길게는 수십 년 미뤄온 입 안의 대공사를 앞두고 결의를 다졌다고나 할까. 남들 들으면 웃긴다 할 테고, 남들이 직접 보았으면 손가락질할 일이지만 나에겐 그랬다. ‘무섭지 않다, 두렵지 않다, 떨리지 않는다,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해낼 수 있다’ 이런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집에서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속으로만 속으로만 다졌다. 아내도 “무섭겠다.”고 했지만 “그래 좀 무섭긴 하네.”하고 말았다.

수술에 들어가면 최소한 두 시간에서 어쩌면 네 시간 정도 걸릴지 모른다는 말을 듣고, 혹시 중간에 화장실 가야 할 일 생기면 어쩌나 싶어 밥도 적게 먹고 마실 것은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 맛있는 돼지고기된장찌개를 끓여 맛있게 먹으면서도 제발 배탈이 나지 않았으면 하고 빌었다. 긴장하면 아랫배, 윗배가 동시에 아파오는 체질이 내일은 조용히 넘어가 주기를 빌었다. 맵지 않고 짜지 않게 먹었다. 치과 수술하고 나면 며칠 동안 먹는 게 부실해질 터이니 제대로 먹으라고 주위에선 말했지만 나는 오히려 속을 비우는 방법을 택했다. 배고픈 건 참을 수 있지만 수술 도중 화장실 뛰어가는 일이 일어나면 안 되겠기에. 아침도 대충 때웠다. 우황청심환이 냉장고에 한 병 있는데 그땐 기억나지 않았다.

치과에 가니 오줌이 마렵다. 젠장. 9시 50분쯤 도착하여 본격적으로 수술을 시작한 10시 30분까지 화장실을 몇 번이나 들락날락거렸는지 모르겠다. 마취만 했을 뿐인데도 심장은 팔딱거리고 머릿속은 어지럽고 뱃속은 부글거리고, 아무튼 긴장도 긴장도 이런 긴장은 처음인 듯했다. 태어나 수술이라는 것을 처음 해보는 것도 아니다. 47살의 나이에 결혼식 주례도 해 봤다. 숱한 긴장의 순간을 보내었건만, 치과 수술을 앞둔 나는 마치 인생을 종치기라도 하는 듯한 두려움과 초조함에 떨었다. 의사 선생님이나 간호사 선생님들이 속으로 ‘난생 저런 환자는 처음 본다’며 웃었을지 모른다. 창피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수술대에 눕고 초록색 천으로 온몸을 가리고 얼굴 부분만 밝은 수술등 아래에 내밀어졌다. 다리는 차려 자세를 하고 양손은 단전 위에 다소곳이 얹었다. 익숙한 의사 선생님의 목소리와 두세 명이 번갈아 대답하는 간호사 선생님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입 안만 마취를 했기에 정신과 다른 몸은 말짱한 상태이니 당연했다.

기적이었을까. 나는 태어나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살던 고향집을 떠올렸다. 우리집은 미천면 안간리 숲골마을에 있었다. 그것도 골짝 맨 위 대숲 속에 있었다. 나는 큰방, 작은방, 마루, 부엌, 외양간, 닭장, 장독대, 수돗가, 마당, 빨랫줄, 가죽나무, 헛간, 화장실 들을 커다란 영화 화면에 펼쳐놓았다. 그 그림은 총천연색이었다. 마당 가에는 감나무가 두 그루 있고 대추나무, 아주까리, 해바라기가 심어져 있다. 계절은 달라도 꽃들은 죄 피었다. 장독대 근처엔 석류나무와 커다란 감나무가 있다. 외양간 앞에는 거름이 쌓여 있고 헛간에는 거름과 재, 그리고 농기구 들이 주렁주렁 걸려 있다.

나는 낯설지만 익숙한, 친하지만 오랜만에 만나는 나그네 같은 가족이 되어 집을 방문한다. 가출한 지 몇 십년 만에 돌아온 것처럼. 집 안팎 구석구석을 이 잡듯이 뒤진다. 아주 천천히, 느린 동작으로. 큰방 문도 열어 보고 작은방 문도 열어 본다. 작은방엔 네 아들들이 고구마를 먹거나 공부를 하거나 고무지우개에 이름을 파고 있다. 외양간 앞에선 작두로 소여물을 썰고 아궁이엔 감자나 고구마가 익고 있으며 가마솥에선 발가벗은 형제들이 목욕을 하고 있다. 대밭에선 솨솨~ 하는 바람소리가 들린다. 외양간 옆 개집에서는 누런 개가 컹컹 짖는다.

아주 느린 걸음으로 고향집을 살펴보는 데 어데선가 “아~ 하세요.”라는 소리도 들리고 “삼키지 마세요.”라는 말도 들리고 “고개를 들리실게요.”라는 말도 들린다. 아~하고 입을 벌릴 때는 고구마를 먹었고 삼키지 말라고 할 땐 구정물을 본 듯했고 고개를 돌릴 때마다 아버지, 어머니, 형제들이 거기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아내와 아들도 거기서 웃고 있다. 무엇을 잘못 밟았다 싶어 “아야!” 했더니 “아프세요?”라고 되묻는 소리가 들린다. 뜨거운 고구마를 먹다가 입술을 데었는가 싶은데, 수술 도중 아랫입술이 조금 씹힌 듯했다.

마당에서 동네 아이들과 딱지치기 하는 나도 보이고 넓게 펼쳐놓은 멍석에선 붉은 고추가 여물어가고, 아, 그리고 고구마순을 심는 아버지와 아들이 나누는 대화도 들린다. 그 곁엔 물앵두가 붉고 탐스럽게 익어 신맛을 다시게 한다. 물앵두는 우리집 마당에서 손이 바로 닿지만 주인은 아랫집이다. 그 아랫집 아들은 친구이다. 집 뒤 대밭에선 어머니가 닭을 부르고 다시 부엌에선 된장시래기국이 구수하게 익어간다.

넓다고 해도 한 시간이면 충분히 다 돌아볼 만한 고향집이다. 한 시간이나 걸릴 게 어딨나. 30분쯤 지났나 싶었다. 드디어 정신이 좀 돌아왔다. 의사 선생님이 “90%쯤 했습니다.”라고 말한다. ‘벌써?’ “이제 꿰매기만 하면 됩니다.”라는 말을 듣자 안도의 한숨이 나도 모르게 새어 나왔다. ‘생각보다 빨리, 아니 너무 빨리 끝나는구나. 모든 게 쉽게 잘 진행됐나 보구나.’라고 생각했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그때부터 10여 분 동안 머릿속에 들어앉은 그림은 내 입 속이었다. 치아와 입술, 입천장, 혀, 혀뿌리, 목구멍, 잇몸, 잇몸뼈 그리고 그것들 사이로 오고가는 실과 바늘, 의사 선생님의 손, 간호사 선생님이 들고 있는 보조기구들이 그림으로 다가왔다. 그 그림은 다가왔다기보다는 나를 짓누르는 돌덩이처럼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거의 느낌이 없었는데 그것들은 어디에 있다가 갑자기 나타난 것일까. 신기한 일이었다. 인공뼈는 어떻게 생겼을까, 임플란트 기둥은 어떤 모양일까 하는 상상도 날개를 펼쳤다. 어데선가 시계 초침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드디어 끝났다.

일어나자마자 시계를 보니 12시 15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30분은 좀 심했고 1시간은 걸렸겠거니 했는데 1시간 40분을 더 넘긴 것이다. 마지막 10% 남았다고 했을 때부터는 왜 이렇게 시간은 안 가고 진행속도는 더딘가 했는데. 아주 편한 마음으로 고향집 나들이를 하고 나니 모든 게 끝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처음부터 수술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었더라면 1시간 40분 동안 나는 몸을 배배 꼬고 뒤틀었을 것이다. 몸 여기저기가 가려웠을 것이다. 뒷골이 아프고 혈압이 오르며 심장이 용맹스럽게 박동했을 것이다. 아랫배, 윗배가 아파서 끝내 견디지 못하고 치과 수술 역사상 처음으로 도중에 화장실로 달려갔을 것이다. 아니면 그 자리에서 실례를 해버렸거나. 그런 지경이 되면 누군가 약국으로 청심환 한 병 사러 달려가지 않았겠는가 말이다.

의사 선생님은 인자한 목소리로 “잘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월요일 밤에 꾼 꿈 그대로다. 그제서야 나는 “화장실부터 다녀올게요.”라고 말했다. 수술 전에 우려했던, 혈관이 터지지도 않았고 그 외 이런저런 어려운 요소들이 거의 별 문제 없었다고 한다. 잇몸와 코뼈 사이 빈 공간에 인공뼈를 넣고 내친 김에 임플란트를 위한 기둥도 네 개나 심었다. 그러한 과정을 통 모르지는 않았는데 그게 꿈인지 생신지 모르고 지나간 것이다. 드릴로 구멍을 뚫고 나사를 조이는 듯한 장면에서, 아버지는 마당에서 담배 입에 물고 우리들 머리를 깎고 있거나 지붕 이엉을 걷어내고 슬레이트를 올리고 계셨다. 생리식염수가 흘러 목구멍으로 꼴딱꼴딱 넘어갈 땐, 막걸리 심부름 다녀오던 길에 궁금함을 못 이겨 한두 모금 훔쳐 먹던 장면 아니었을까.

짧은 하루인데 길이 기억에 남을 하루였다. 마인드 컨트롤, 아니지 마음 조절에 성공한 덕분이다. 우황청심환보다는 마음속 고향 나들이가 백 번 나았다. 그나저나 이 새가슴을 어째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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