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에 부합하지 않는 과거 얘기를 한 번 해 보련다."

*** 이 글은 어디까지나 지난 80년대 필자만의 경험에 의존한 것이어서 현재의 상황과는 전혀 맞지 않음은 물론이거니와, 기억을 떠듬떠듬 재구성한 것이어서 다음의 개별 사례가 팩트에 부합하는지조차도 자신이 없음을 밝힌다. 시작한다.

 

기자는 왕이었다

얼렁뚱땅 어쩌다 기자라는 직함을 가졌던 84년 초봄. 기자 선배들의 행태에 경이로움을 넘어 황당함을 느낀 나는, 명함을 받은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나만 바라보며 오랜 세월 고생하셨던 어머니에게 ‘장 시간’ 고민 끝에 일자상서 했다. “어머니. 기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할 일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냥 동사무소 직원이 낫지 이건 아닙니다.” 어머니는 아무리 기다려도 답장이 없으셨다. 지금은 대충 짐작한다. 한 직장에서 한순간 ‘잘못된’ 판단으로 뛰쳐나오면 앞날이 힘들게 전개될 것이 뻔한 상황을 익히 알고 계셨던 어머니는 답장을 하지 않는 것으로 철없는 아들을 경계한 게 아마 맞을 것 같다. 어머니의 가르침은 이런 게 아니었을까. “네가 하기 나름이야.” 대충 짐작하고 그 가르침을 가슴에 아로새긴 뒤 ‘장 시간’ 나름으로 애를 썼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지나온 인생길이, 지나온 내 인생이 그리 제대로 된 삶은 아닌 것 같다. 은연중에 나도 이런저런 방식으로, 가끔씩 기자라는 직함을 즐긴 건 부인하기 힘 드는 사실이니까. 그 당시 기자는 왕이었다. 지금은 절대 그럴 리 없지만.

 

▲ 박흥준 선임기자

기자는 게으름뱅이었다

경찰.검찰 패트롤(기자 초년병이 꼭두새벽에 경찰.검찰을 돌며 밤 사이 발생한 사건사고를 챙기는 일)을 열심히 하다가 두어 달쯤 지난 뒤 문득 깨달음이 왔다. 왜 나만 이런 일을 하지? 왜 나만 힘들지? 왜 아무도 없지? 다른 언론사들은 내가 현장에서 힘들여 캐치한 팩트를 현장에 오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나보다 먼저 보도하지? 뒤늦게 이리저리 알고 보니 타사 선배들은 제보자를 다수 확보하고 있었고 매 시 유선보고를 하는 공무원들(요즘 말로는 빨대)도 출입처에 심어놓고 있었다. 지리산 자락에 은거하며 세상사를 꿰뚫었던 남명 선생처럼 그 분들은 기자실에 죽치고 앉아서 세상을 꿰뚫고 있었다. 소파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궐련을 지긋이 물던 그 분들은, 그러나 내가 보기에 영락없는 나무늘보였다. 요즘 시각으로 보면 그 당시 기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게으름뱅이었다. 심지어는 아이템(보도자료)을 공보실 말단 공무원이 기사로 써서 기자 대신 송고하기도 했다. 지금은 절대 그럴 리 없지만.

 

기자는 노름꾼이었다

기자실에 처음 들어갔을 때 내가 들었던 소리들은 왁자지껄, 푸하하하, 점심은 니가 사라, 에이, 젠장맞을, 니기미 등등이었다. 하늘같은 선배들이 한창 신나게 하시던 일은? ‘고스톱’이었다. 가끔은 ‘훌라’(카드놀이)도 하셨다. 공손히 인사하는데 그 분들은 바빠서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공보실장 또는 공보계장이 오전 10시부터 교대로 끼어 앉아 돈을 조금씩 잃어주는 것으로 하루의 업무에 충실하고 있었다. 가끔씩 기자실에 비치된 유선전화로 어린 내가 뜻을 전혀 알 수 없는 대화를 전화기 너머의 그 누구와 나누는 것을 제외하고 그 분들이 하시는 일은 ‘딱지 치기’ 또는 ‘딱지 던지기’가 전부였다. “어이 공보계장! 지갑 좀 꺼내라.” “공보실장. 니 이런 식으로 나오면 시민과장 한 번 못 하고 순식간에 날아간데이. 좋은 말로 할 때 조심 안 할 끼가?” 아아! 이런 세상도 있었구나. 그 당시 기자는 노름꾼이었다. 지금은 절대 그럴 리 없지만.

 

기자는 거간꾼이었다

민원인(?) 한 분이 조용히, 공손히 기자실 문을 빼끔 연다. 꾸벅 머리를 조아린 뒤 주변을 잠시 둘러보고는 어렵사리 입을 뗀다. xx일보 00기자님이 어느 분이신지요? 고스톱이 한창인 기자선배들은 어떤 삼매경에 빠져 아무도 대꾸를 안 하시고 고개도 안 드신다. 민원인은 두 손을 모으고 기자실 구석에 찌그러져 조용히 서 계신다. 한 판 승부가 끝나고 커피 한 잔씩 마신 뒤 30여분 후 드디어 선배 한 분이 다소 위압적으로 말씀하신다. “무슨 일이요?” “저어... 형질변경에 문제가 있어서...” “그래요오? 일단 앉으소.” 80년대 풍경이지 지금은 절대 아니라는 것을 나는 확신한다. 지금은 절대 그럴 리 없다.

 

기자는 기피대상이었다

어머니의 암묵적인 명령에 따라 “이건 아닌데...” 하면서도 사표를 쓰지 못 하고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나에게도, 사표를 절대 써서는 안 되는 이유가 ‘드디어’ 생기고야 말았다. 제 눈에 안경이라고 어떤 예뻐 보이는 여자(지금도 물론 예쁘다)가 순식간에 내 앞을 지나갔고, 나는 뒤따라갔고, 맹세했고, ‘드디어’ 알콩달콩 밀당 단계에 진입한 게 바로 그 것이었다. 그 때부터 세상이 달리 보이기는 했는데 문제는 "세상은 만화경이 아니라 그야말로 지옥이었다"는 데 있었다. 장래 처갓집 대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일언반구 기척이 없었다. 사윗감이 기자라는데 섣불리 문을 열어주시는 장모님 장인어른이 그 당시에는 한 분도 안 계셨다. 비를 맞으며 무릎꿇고 빌어도 나와 보지 않으시고, 세 끼를 단식투쟁하는데도 불어터진 라면 한 그릇 던져지지 않았다. 그 당시 기자는 기피대상이었다. 지금은 절대 그럴 리 없지만.

 

당시 그 기자(초년병)는 결국 '페시미스트'를 자처했다. 그리고 '니힐'의 세계를 오랫동안 맴돌았다.

記者? 천만에, 忌者!

記者? 천만에, 奇者!

記者? 천만에, 棄者!

지금은 절대 그럴 리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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