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살의 너와 나

아들의 신발이 또 작아졌다. 6개월 전에 샀는데 밥 먹은 게 다 발로 갔나. 그새 키도 조금 더 자랐다. 이제는 마주서면 눈높이가 나보다 15도 정도 위에 있다. 코밑에는 수염도 제법 거뭇하다. 갓 모심기를 마친 초여름의 논 같다. 여린 솜털이 제법 촘촘하게 자라서 면도기를 하나 사야 되나 생각 중이다. 손도 나보다 커졌다. 작은 단풍잎만 하던 손이 언제 이렇게 자랐는지. 아들의 몸이 나날이 팽창하고 있다.

목소리도 변성기가 와서 지하 3층에 내려가 있다. 반면 자기주장은 천정을 뚫고 나간다. 아들, 공부 좀 하지? 싫어. 책상정리 좀 해. 싫어. 동생하고 간식 나눠먹어. 싫어. 이런 싫어증 환자 같으니라고. ‘싫어’와 쌍벽을 이루는 말로 ‘왜’가 있다. 심부름이라도 시키려고 부르면 첫마디가 “왜?”부터 나온다. 아니, 어른이 부르는데 왜라니? 우리 땐 안 저랬다. 엄마가 부르시면 공손하게 문을 열고 나와서 ‘엄마, 뭘 도와드릴까요?’라고 했던 것으로 어슴푸레 추정되는데. 넌 왜 내가 부르면 나오지도 않고 '왜'만 하니? 대체 왜?

▲ 재인 초보엄마

그래서 요즘 아들과 5분 이상의 대화가 어렵다는 것을 실토한다. 말끝마다 ‘싫어, 내가 왜?’를 반복하는 삐딱이와 대화를 하다보면 4분50초쯤 속에서 부글부글 뭐가 올라온다. 참아야 하느니. ‘참을 꾹’을 되뇌이며 평온하게 용건을 전달하고 나오기만 해도 잘한 거라고, 나 자신을 다독이는 것으로 마무리. 그렇다고 해서 내가 옆집 누구와 우리 아들을 비교하거나 하진 않는다. 아이들마다 성향이나 성격이 다르고 성장속도도 다르다는 걸 일찍이 간파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비교하는 대상이 있으니. 그건 바로 15살의 '나'이다.

지금의 아들 나이, 중학교 2학년 때 나는 조용한 아이였다. 당시 우리 학교도 교복을 입었지만 일주일에 하루, 수요일만 사복이 허락되었다. 아이들은 수요일만 되면 패션쇼라도 하듯이 화사한 옷들을 깔맞춤해서 입고 왔다. 하지만 나는 수요일에도 늘 똑같은 차림이었다. 청바지에 흰 티셔츠. 엄마가 입으라고 주신 옷을 한 번도 싫다고 해 본 적 없이 입고 다녔다. 엄마에게 용돈을 따로 달라고 해 본 적도 없었다. 엄마가 주시면 쓰고 안 주시면 안 썼다. 그때도 요즘의 PC방 같은 오락실이 있었지만 가 본 적이 없었다. 학교 마치면 곧장 집으로 와서 엄마가 일을 마치고 오실 때까지 혼자 숙제를 하며 기다렸다. 엄마가 좋아하는 김치전을 만들어놓기도 했다. 엄마가 일 마치고 오시면 피곤할 테니까. 일찍 세상을 떠난 아빠를 대신해 나를 키우느라 힘들게 고생하시는 엄마를 기쁘게 해 드리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15살의 아들은 정반대다. 어른 말을 들으면 큰 일 나는 줄 안다. 매주 용돈도 주는 족족 다 쓰고 와서는 더 달라고 손을 내민다. 그것도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친구집에 갔더니 무슨 게임기가 있더라면서 그걸 사달라고 말할 때도, 친구네는 외국 어디로 가족여행을 갔다 왔다는데 우리도 가자고 말할 때도 거리낌이 없다. 우리 부부가 일을 마치고 와서 보이는 지치고 피곤한 기색 같은 건 아웃 오브 안중, 그저 당당하게 요구한다. 물론 내가 클 때와는 세상이 많이 달라졌음을 인정해야겠지. 아이들도 보고 듣는 게 달라졌음을. 그 때와는 비교할 수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달라도 어쩜 이럴 수가 있는지. 네가 먹고 남은 과자봉지도 치우지 않고 방을 엉망으로 만들 나이에 나는 혼자서 김치전을 부쳤다고. 그 생각이 들 때마다 벌컥 화가 올라왔다.

그 화는 어디에서 왔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감정의 밑바닥에는 어른들의 말을 무조건 수용하기만 했던 15살의 어린 내가 숨어 있었다. 그 때 나도 친구들처럼 예쁜 옷을 입고 싶었고 놀러 다니고 싶었지만 그런 것을 말하지 못했다. 그래야 어른들이 칭찬해 주셨고 엄마가 편안해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고 싶은 것을 참고 지냈다. 그 억울함과 답답함이 거의 30년이 되도록 안에 쌓여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내 안에는 아직도 15살의 내가 살고 있구나. 15살의 내가 15살의 아들에게 화를 내고 있구나.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아들은 매일 저렇게 쑥쑥 자라고 있는데 엄마는 15살의 한계에 갇혀 내가 아는 세상만을 강요했으니. 아들은 또 얼마나 갑갑했을까. 아들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 주려면 나도 같이 성장해야 하거늘. 성장판이 멈춰버린 엄마는 그래서 요즘 고민이 많다. 시야를 넓히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여전히 헷갈리고 아리송하다. 다만 한 가지, 지금도 조용히 숨죽인 채 웅크리고 있는 15살의 나에게 말을 붙여보려고 한다. 그때 너는 최선을 다했다고 칭찬해 주고 안아 주려고 한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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