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 봄에 나는 저 산을 넘어가보지도 못하는구나."

봄볕이 따가웠다. 벌써 며칠간 더위가 계속되었다.

다랑이논밭이 붐비기 시작했다. 트랙터와 경운기가 쉴 새 없이 돌아가고, 노인네들은 힘겨운 괭이질이다. 경운기나 트랙터로 일품을 파는 이들은 몇 되지도 않는데 여기저기 구석구석 논밭은 많으니 밭일을 서로 빨리 하려고 실랑이를 벌이기도 한다.

올해는 감자를 많이 심었다. 해마다 홍감자와 흰감자를 섞어 조금 나누고 우리 먹을 만큼만 심었는데 나누다 보면 우리가 먹을 것은 작은 것만 남고, 턱없이 부족하여 사다 먹기 일쑤였다. 그래서 어쨌거나 기초농산물만큼은 자급자족의 원칙을 지켜나가야겠다는 다짐으로 올해는 예년에 비해 감자를 두 배는 더 심었다.

▲ 김석봉 농부

올해도 밭갈이는 농기계에 맡겼지만 이랑을 만들고 비닐멀칭을 하는 일은 내 몫으로 남았다. 뿌리채소는 하루라도 빨리 심어야 하기에 숨 가쁘게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랑을 만들고 비닐멀칭을 하기까지 허리는 부러질 듯 아팠고, 땀을 비처럼 쏟았다. 그리고 마침내 어제 오후나절에야 감자와 산마, 우엉, 토란, 생강 심기를 끝마쳤다.

일을 도우러 왔던 마을 아줌마들이 내려가고, 잠시 밭두렁에 홀로 앉았었다. 여기저기 꽃이 담뿍 피었다. 건너편 김씨네 농막엔 벚꽃이 만개했고, 밭두렁 조팝나무엔 꽃송이가 눈송이처럼 하얗게 쌓였다. 멀리 칠선계곡 초입 산등성이 산벚나무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봄이 왔다.

올해도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사나흘 기차여행을 하려던 계획은 2월 말에서 3월 초로 미루어졌고, 다시 3월 말로 미루어졌고, 4월 중으로 미루었건만 이처럼 농사가 시작됐으니 엄두를 내기가 어려울 것이고, 게다가 드문드문 민박예약도 잡혀있어 마땅히 빈 일정을 찾을 수도 없을 것이다.

그 흔한 봄나들이 한 번 못한 채 봄을 보내고 여름을 맞이하겠지. 마당 여기저기서 피는 꽃들의 잔치를 보며 봄내음이라도 맡으련만 화무십일홍이라 매화도 앵두꽃도 배꽃도 살구꽃도 복사꽃도 한 줄기 봄비에 사흘을 견디지 못하고 속절없이 져버리는구나. 하늘하늘 날갯짓으로 다가오던 나비도, 닝닝거리며 꽃가지 사이를 날던 벌도 지는 꽃잎 따라 떠나버리고 허심한 봄 가랑비만 스렁스렁 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구나.

저 산 너머엔 천천히 흐르는 넓은 강과, 한때 옛 친구가 잠시 머물렀다는 강마을이 있고, 강 끝자락으로 흘러 내려가면 하루 서너 대 보급열차가 서는 조그만 기차역이 있다고 하는데 아, 이 봄에 나는 저 산을 넘어가보지도 못하는구나. 기차를 타고 동해바다까지 나가보려던 꿈을 앵두나무 꽃그늘 아래 묻고 말았네.

애꿎은 마음에 비가 내린다. 세상은 소란하구나. 도의원 선거에 나서는 지인으로부터 오랜만에 소식이 오고, 시장선거에 나서는 한 다리 건너 대충 아는 지인으로부터 카톡이 오고, 내가 사는 여기 함양군수 후보와 군의원 후보들의 알림문자가 시도 때도 없이 와서 쌓이는구나.

선거에 보태줄 돈도 없고, 멀리 있어 찍어줄 표도 없는 여기 지리산 산골에 사는 내게 왜 그런 소식이 와 닿는지 까닭을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지인이라고 전해주는 소식이 아니 반가울리야 있겠는가. 허나 건네줄 소식이 마땅찮으니 그 또한 짐이 되고, 스스로 허탈해지기도 하는구나. 전자우편함을 열어본지도 참 오래 되었네.

군둥내 나는 묵은지를 씻어 밥을 먹자. 아내는 쑥국을 끓이고, 쌉싸름한 머위된장무침을 한다. 밥을 먹고 가랑비 사이를 걸어 밭을 둘러봐야지. 밭두렁 양지쪽에 더덕순은 올라왔겠지. 아직 비어있는 고랑엔 근대씨를 넣고 양배추를 심어야겠지. 수박과 참외모종은 어느 고랑에 심어야 할까. 옥수수씨 묻을 자리에 퇴비가 모자랄지도 몰라.

나는 밭두렁에서 하릴없이 발돋움을 하게 될 것이다. 비안개가 온 몸을 덮어오고, 그 사이 야속하게 앞을 가로막고 선 저 우람한 능선에 산벚꽃은 피고 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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