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감한 기자들보다 더 중요한 건 용기 있는 사장(사주)이다

영화 <더 포스트>를 봤다. 워터게이트로 유명한 <워싱턴 포스트>에서 일어난 1971년 ‘펜타곤 페이퍼’ 폭로를 둘러싼 사장과 편집국장, 기자들 사이의 갈등과 협력 과정을 역동적으로 보여주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작품이다.

펜타곤 페이퍼(국방부 기밀문서)는 제2차 세계대전 때부터 1968년 5월까지 -트루먼에서 존슨까지 4명의 대통령 재임 시기- 미국이 인도차이나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기록한 문서로, 베트남 전쟁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의 지시로 작성됐다. 이 작성작업에 참여했던 MIT 연구원 다니엘 엘스버그는 미국정부가 대외적으로 밝힌 것과는 달리 베트남 전쟁 개입이 각종 거짓말과 조작에 따른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통킹만 사건’이다. 보고서에는 결정적으로 미국이 베트남에서 절대 승리를 거둘 수 없다는 추론이 담겨 있었다. 따라서 미국은 패배를 뻔히 내다보면서도 젊은이들을 베트남에 보낸 셈이 되는 것이다. 은폐돼 온 정부의 저의를 폭로해야겠다고 결심한 엘스버그는 7천 쪽에 이르는 방대한 보고서를 처음에는 <뉴욕 타임스>에, 다음에는 <워싱턴 포스트>에 유출시켰다.

▲ 최용익 전 MBC논설위원

이 영화의 스토리는 2명의 주인공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편집국장 벤 브래들리와 사주이자 발행인 캐서린 그레이엄이 그들이다. 그러나 감독은 그레이엄 사주(여)에게 초점을 맞춘다. 그녀의 아버지는 핏줄을 이어받은 딸보다 사위의 능력을 더 높게 평가해 신문사를 물려주었지만, 남편의 자살로 뜻하지 않게 신문사를 물려받게 된 그레이엄이었다. 그러니 신문사 간부들마저 그녀의 능력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상황에서 그녀는 사안을 주도하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끌려 다녔다. 하지만 그녀는 결정적인 시기에 발행인으로서 용기있는 결단을 내린다. 경영난을 겪고 있던 워싱턴 포스트에 큰 도움을 줄 투자유치가 무산될 위험 앞에서도 펜타곤 페이퍼의 보도를 단호하게 결정한 것이다. <뉴욕 타임스>의 후속 보도를 금지한 법원의 판결을 무시하고 <워싱턴 포스트>가 다시 기사를 실을 경우 실형을 살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변호사들이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결국 그레이엄은 지속적인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결단함으로써 직업윤리와 용기를 갖춘 언론인으로 역사에 남게 됐다.

이 영화의 소재는 47년 전 미국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현재의 한국에서는 비일비재한 풍경 중 하나다. 미국의 언론들과 달리 권력 앞에 서면 벌벌 떠는 언론의 약한 모습 말이다.

한국의 가장 큰 (자본)권력, 삼성과 관련된 것만 해도 그렇다.

먼저, 지난 번 칼럼에서 지적했던 언론사 간부들이 삼성 미래전략실 사장 장충기에게 보낸 문자이다. 최고권력 삼성이 언론을 어떻게 주무르고 있는지, 그리고 일부 언론사 간부들이 ‘삼성의 똘마니’로 어떻게 놀아났는지 그 정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둘째로 들 수 있는 최근의 사례는 법조 출입기자단이다. 법원과 검찰 등을 출입하는 법조 출입기자단은 지난 2월 21일, 삼성전자 부회장 이재용의 항소심 판결문을 공개했다는 이유로 <오마이뉴스>에 출입정지 1년의 중징계를 내렸다. <오마이뉴스>는 이재용이 집행유예로 석방되면서 논란이 일자 해당 판결문의 주요 쟁점과 함께 전문을 공개했다. 법조기자단은 사건의 대법원 확정판결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하급심 판결문을 공개하는 것은 기자단의 ‘엠바고’ 합의를 어긴 것이라며 출입정지라는 중징계를 결정한 것이다. <미디어오늘>은 “이재용에 대한 2심 판결문은 한국사회를 뒤흔들었던 사건에 대한 판결문이었고, 선고 당시 국민적 분노를 산 담당 부장판사 정형식에 대한 파면을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물이 올라와 청와대까지 답변했던 사안”이라며 “출입기자단의 중징계는 국민의 알권리를 막는 행태라는 비판이 예상된다”고 지적했다.

기자단 자체가 철폐해야 할 구시대적 유산이지만, 법조기자단은 ‘언론은 통치자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섬겨야 한다’는 펜타곤페이퍼 사건 당시 미국 연방대법원이 내린 판결을 되짚어 보기 바란다. 그레이엄 사주의 말처럼 “뉴스는 역사의 초고"이다. 따라서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언론의 1차적 임무는 사실을 은폐하지 말고 까발려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판결문 공개는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이 같은 시각은 전체주의 시대에나 어울리는 것으로 시민들의 수준을 우습게 보는 케케묵은 논리이다. 기자단이 우려했을 이재용의 사생활 침해 여부는 시민들이 판단할 몫이다.

그런데 기자/PD들이 아무리 세기적인 특종거리를 물어온다 하더라도 위의 간부들이 내지 못하도록 방해한다면 난감해진다. 하물며 언론사의 최고 우두머리인 사장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보도를 가로막을 경우 평기자/PD 입장에서 대항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요즘은 언론사별로 노동조합이 활성화돼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도 노사갈등의 가장 큰 원인은 사장(사주)의 독단에 따른 보도 개입에 있다고 할 수 있다.

2005년 MBC 이상호 기자가 특종한 삼성그룹의 비자금 수수와 관련된 안기부 X파일 사건이 그랬다. 안기부 X파일은 한국 최대의 재벌기업 삼성이 한국사회를 배후에서 돈의 힘으로 조종해 온, 정-경-언-검 4각의 부패커넥션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내용이 담겨있어 21세기 한국판 ‘판도라의 상자’라는 닉네임을 얻고 있었다. 삼성의 전방위 로비사실이 드러나는 것이어서 명예훼손 등으로 걸릴 거액의 손해배상 소송을 각오해야 하는 대단한 용기와 확신이 필요한 세기적 특종이었다. 폭압적인 닉슨 정부를 상대해야 했던 <워싱턴 포스트>의 그레이엄 사장과 같이 말이다.

그러나 MBC는 <워싱턴 포스트>가 아니었으며, 당시 사장 최문순은 그레이엄이 아니었다. 이상호는 지도자를 잘 못 만난 것이다. 최문순은 한 때 언론노조 위원장으로 선명성을 자랑하는 듯 했으나, 노무현 정권과의 유착으로 돌연 MBC 사장이 된 후에는 이상호가 발굴한 안기부 X파일의 보도를 6~7개월 동안이나 연기에 연기를 거듭하고 있었다. 불법 도청을 금지하고 있는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을 들먹이면서 말이다. 그 6~7개월이 이상호에게는 극한적인 인고의 세월이었을 것이다. 최문순의 행태는 <뉴욕 타임즈>의 후속보도를 금지시킨 법원의 명령을 어기고 <워싱턴 포스트>가 보도할 경우, 감옥에 갈 가능성이 높다는 변호사들의 경고에도 보도를 강행한 그레이엄과 대조적이다. 벤 브래들리 편집국장의 대사는 언론의 존재 이유를 말해준다. "우리가 하지 못한다면 누구에게 책임을 묻겠어요? 우리가 보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지게 됩니다. 국민이 지게 된다고요!"

MBC는 결국 조선일보에서 7월21일, 안기부 도청팀 기사를 터뜨리고 나오자 이를 따라서 X 파일의 내용을 보도하는 초라하고 비겁한 행태를 보이고 만다. 보도국장과 본부장, 그리고 심지어 노동조합과 기자회까지 마치 ‘폭탄 돌리기’ 하듯 책임을 떠넘기고 있던 6월28일 밤, 이상호는 마지막으로 사장 최문순에게 편지를 통해 호소하기로 결심한다. ‘대통령 후보와 국회의원들을 뇌물로 관리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정부와 국회를 만들려는 이건희 일가의 반헌법적 범죄행위’를 두고 볼 수 없었다고 이상호는 회고한다.

“… 저는 지금 매우 곤궁한 입장에 처하게 됐습니다. 보도국 수뇌부로부터도, 노조로부터도 보도에 대한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 사안을 바라보는 회사 측의 입장은 무엇인가 궁금합니다. …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중대한 내용을 기사의 가치가 아닌 경영적 이유로 보도하지 않은 사실이 외부로 알려진다면 회사의 이미지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 제 인생의 사표로 삼아온 존경하는 기자 최문순 선배님, 잘못된 일련의 판단이 힘겹게 쌓아온 MBC의 신뢰성을 허물까 걱정스럽습니다.”(이상호, 『이상호 기자 X파일-진실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258쪽, 동아시아, 2012)

그러나 이상호의 호소는 마이동풍이었다. 이미 삼성에 의해 장악된 노무현 정부의 하수인이 된 최문순은 돌아서지 않았다. 최문순은 전국언론노조 위원장에서 사장으로, 그리고 국회의원으로, 지금은 도지사로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자리를 옮겨 다니는 전형적인 폴리널리스트(정치기자)였다. 그 실체를 이상호나 주위 사람들이 제대로 몰랐던 것일 뿐이다.

지금 생각해도 끔찍한 것은 당시 이건희의 뇌물 심부름꾼 역할을 맡았던 홍석현이 주미대사에 이어 유엔 사무총장이 됐을 경우다. 아마도 이상호의 X파일이 없었다면 홍석현은 대통령 후보로 나서거나, 실제로 됐을 수도 있다. 비록 MBC가 주도적으로 터뜨리지는 못 했으나 조선일보가 안기부 미림팀의 도청행위를 보도한 데 이어 ‘이상호의 X 파일’이 보도됨으로써 당시 주미대사로 가 있던 홍석현은 꼼짝없이 낙마하게 됐고, 그의 꿈은 사라지게 된다. 우리 모두는 기자 이상호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이명박 정권 때 해직됐던 이상호는 박근혜 정권 때 복직됐으나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당시 경영진에 의해 정직 등 중징계를 당하다가 결국 사표를 내고 지금은 <고발뉴스>에서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펜타곤 페이퍼 보도에 이어, 이 때 얻은 국민적 지지를 바탕으로 이듬 해인 1972년, ‘워터게이트’를 터뜨림으로써 닉슨 대통령을 권좌에서 물러나게 한다. <워싱턴포스트>는 ‘국가가 국민을 지키지 못할 때, 지키려 하지 않을 때’ 사주와 편집국장, 기자들이 똘똘 뭉쳐 언론사의 모든 것을 걸고 싸웠다. 하지만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지금 한국에서는 여전히 국민이 아니라 자본과 권력을 섬기는 언론이 부기지수이다.

 

사족.

우리는 언제쯤이나 이런 영화를 한 편 만들 수 있을까?

한류 신드롬을 일으킬 정도로 한국의 영화제작 수준이 높아졌다는데 아직까지 불의한 현실과 그에 맞서 싸우는 언론(인) 등, 양심적인 개인과 집단, 세력에 관한 영화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하기는 1987년 6월 항쟁이나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영화화 작업도 이제 시작되는 단계이니 갈 길이 멀기만 하다. 영화인들의 분발을 기대한다.

저작권자 © 단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