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는 너의 말을 공감하기 위해

눈이 왔다. 그날 아침 날씨를 확인하려고 부엌에서 작은 쪽문을 열었을 때 제법 하얗게 쌓인 눈을 보는 순간 잠깐만, 머릿속의 두꺼비집을 한번 껐다가 다시 켰다. 희다 못해 약간 푸른 빛마저 감도는 아파트 마당이 왠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때 열린 창문으로 찬바람이 훅 들어왔다. 잠이 덜 깬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눈이 왔다. 꽃피는 춘삼월에 아무런 기별도 없이, 뜬금없이 그렇게.

덕분에 그 날 아침은 아들을 깨우기가 한결 수월했다. 이불 속으로 파고들던 녀석은 눈이 왔다는 말에 부스스 창문 앞으로 기어가서 제 눈앞의 광경을 확인하고는 입냄새를 풍기며 웃었다. “엄마, 오늘 학교 가요?” “왜?” “눈 왔으니까 학교 안가는 거 아닌가?” “아니거든! 얼른 씻기나 해” 뒤통수에 까치집을 짓고 화장실로 향하는 녀석을 보며 피식 웃음이 났다. 저깟 눈에 학교 안 갈 생각부터 하다니. 과연 한결같구나.

▲ 재인 초보엄마

그날 저녁, 학원에서 돌아온 녀석은 빨랫감을 한 무더기 내놓았다. 점심시간에 친구들하고 운동장에서 눈싸움을 했다고 했다. “중학교 2학년도 그런 거 해?” “응. 등에 애들이 막 눈 집어넣고. 나도 엄청 집어넣었지. 헤헤” 하얀 운동장에서 검정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눈싸움 하는 장면이 눈앞에 그려졌다. 삼선 실내화 그대로 뛰쳐나온 건 아닌지. 발이 시린 줄도 모르고 뛰어다녔을 아이들을 생각하니 또다시 웃음이 났다. 얼마나 신났을까. 갑갑한 교실에 갇혀 있던 녀석들을 잠시 해방시켜준 눈이 새삼 고마웠다.

춘삼월에 내린 눈처럼 뜬금없기는 아들도 우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엊그제도 문득 와서 “엄마, 나 배치고사 1등 했어요” 오, 신이시여. 제게도 이런 날이 오는군요. “배치고사 1등? 진짜?” 마른 침을 삼키며 다음 표정을 준비하고 있을 때 아들의 말이 엉뚱한 방향으로 튀었다. “응. 고수랑 붙었는데 이겨가지고 레벨 완전 올랐잖아요.” 그것은 게임 이야기였다. 게임에서 한 달 동안 매일 배치고사를 치듯 대결을 치러서 레벨 조정을 해 준다고 했다. 어금니에 힘을 주고 물었다. “그래서, 매일 했어?” “응, 정해진 시간 안에 안 하면 탈락하거든요. 저번에는 완전 고수를 만나서 발린 거야. (‘발렸다’는 중딩 용어로 ‘게임에서 졌다’는 의미다.) 며칠 동안 내가 왜 졌는지 계속 연구했잖아요. 그래 가지고 이번 판에는 이겨줬지. 흐흐” 공부를 좀 그렇게 해 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걸 밥숟갈 크게 뜨고 꿀꺽 삼켰다.

이처럼 아들은 말 잘라먹기 선수다. 앞뒤좌우 맥락이 없고 설명도 없다. 또 하루는 가족들끼리 둘러앉아 밥을 먹고 있는데 진지하게 말했다. “안 되겠어. 매일 돌아오진 못 하겠네” "어? 뭐가 돌아와?” “타임슬립이요. 똑같은 24시간이 매일 반복된다고 했을 때 그렇게 되면 시간을 되돌리는 장치가.. 어쩌구..” 한동안 TV에서도 유행하던 타임슬립에 관한 이야기였으나 뒷말은 무슨 소린지 도무지 해독 불가였다. 이런 패턴이 반복되면서 우리의 대화는 종종 단절되기 일쑤다. 어쩔 수가 없다. ‘오지다, 지리다’ 같은 중딩 용어 자체가 생소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 정도는 외국어를 배우듯이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 다만 근본적으로 아들은 생각 자체가 나와는 다른 우주에 사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계단 3층과 4층 사이에 3.5층이 존재한다는 어느 영화의 발상을 접하고 놀란 적이 있는데, 아들을 보면서도 비슷한 감정을 수시로 경험하고 있으니. 넌 정말 어느 별에서 왔니?

낯선 생명체를 대하듯 아들의 눈을 가만히 응시해 본다. “엄마, 왜? 내가 뭐 잘못했어요?” “아니, 우리 아들 좋아서” 까만 눈동자가 우주처럼 깊게 빛나고 있다. 어쩌면 지금도 아들의 머릿속에선 어떤 영사기가 <플레이>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기만의 세상에서 영사기를 돌려보다가 특별한 장면을 포착하면 <순감 멈춤> 버튼을 누르고 내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앞뒤 줄거리가 생략된 그 장면을 나는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마치 복잡한 CSI 수사 드라마를 1회부터 보지 않고는 내용을 알 수 없는 것처럼. 그래도 기쁘거나 감탄스러운 장면을 혼자 넘기지 않고 말해주어서 고마울 따름이다.

사실 재미있는 건 같이 나누고 싶어지는 법이다. 나도 작년에 드라마 <도깨비>에 빠져있을 때 공유 목소리에 감탄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웠다. 공유 얘기만 해도 국경을 초월할 수 있었다. 할 말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아들의 말을 그 정도 수준으로 공감하려면 국경을 백번쯤 넘어도 될까말까 하다. 아직은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들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소에 아들을 잘 관찰하려고 노력 중이다. 밥상 앞에서 숟가락을 뜨다 말고 멍하니 있는 것이 영사기를 <플레이>하는 중임을 이해하려고 한다. 게임 레벨을 한 단계 올리는 것이 중딩 세계에서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가치를 인정(?)까지는 못해도 적어도 깎아내리진 않으려고 한다. 평소 아들이 생략하고 지나간 말들이 어딘가에 흘러있을 것이다. 눈 크게 뜨고 그 단서를 발견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고 믿는다. 그것이 소통의 시작이라고.

지난 주말, 가족들과 가까운 절을 찾았다. 그새 매화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매화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몇 장 찍고 돌아보니, 빨간 우체통이 눈에 들어왔다. 6개월 뒤에 배달해주는 느린 우체통이었다. 우체통 앞 벤치에 쭈그리고 앉아서 아들에게 엽서를 썼다.

 

아들! 그곳에는 가을이 왔겠구나. 우리 아들 키가 더 많이 자랐겠지? 그때도 공부하라고, 게임 좀 그만하라고 엄마는 잔소리를 계속 하고 있을지 몰라. 그래도 이것만은 확실해. 그때나 지금이나 널 사랑하는 마음에는 언제나 변함이 없다는 거.

 

- 2018년 봄, 매화나무 아래에서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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