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조식 선생의 자취를 찾아서- 단속사지

겨울 지나 봄으로 가는 길. 묵은 겨울을 털어내고 봄을 보고 싶었다. 지나온 세월의 더께만큼 넉넉한 풍경이 품어주는 공간에서 느긋하게 즐기고 싶었다. 봄 햇살을 길동무 삼아 3월 12일, 천 년 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랐다.

 

▲ 산청군 단성면 남사예담촌에서 지리산 천왕봉으로 가다가 나오는 첫 번째 삼거리에서 입석‧청계 쪽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시각도 멈춘 듯 천천히 흘러가는 마을을 지났다. 승용차로 10분 정도 들어가면 입석리가 나온다.

 

산청군 단성면 남사예담촌에서 지리산 천왕봉으로 가다가 나오는 첫 번째 삼거리에서 입석‧청계 쪽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시각도 멈춘 듯 천천히 흘러가는 마을을 지났다. 승용차로 10분 정도 들어가면 입석리가 나온다.

 

▲ 산청군 단성면 입석리는 입석(선돌)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입석마을에 있는 선돌.

입석리는 입석(선돌)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입석마을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통일신라 시대에 창건했다는 단속사와 인연이 있다. 스님이 절을 창건할 당시 법력을 이용해 인근의 돌을 모으던 중 절이 다 만들어져 더는 돌이 필요 없자 단속사로 향하던 돌이 지금의 자리에 그대로 서버렸다고 전한다. 입석리 용두마을을 지나는 모퉁이에 야트막한 언덕이 나온다.

 

▲ 산청 옛 단속사의 입구였던 광제암문이 새겨진 바위를 개인 집이 바위를 빙 둘러 싸고 있다. 마치 개인 정원에 광제암문이 들어 있는 모양새다.

 

 

천 년이 넘는 시간을 거슬러 묵직한 역사 속을 거닐다

 

용두마을 벗어나는 경계에 인근 주민들이 ‘놀이터’라고 하는 언덕이 나온다. 언덕에는 소나무 숲이 시원한 그늘을 드리웠다. 언덕 근처 청계농원 앞에 차를 세웠다. 길 건너로 내려갔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익히 눈에 보아온 풍경이 들어온다. 개인 집이 바위를 빙 둘러 싸고 있다. 마치 개인 정원에 광제암문이 들어 있는 모양새다.

 

▲ 광제암문이라 씌여진 바위. 한 때 최치원(857~?)의 글씨로 잘못 알려져 지금도 그 이가 쓴 글로 아는 이가 많다.

 

아쉬움을 달래며 조심스럽게 개인 집을 둘러 하천 쪽으로 향했다. 얼핏 보면 입을 앙다문 원숭이를 닮은 바위가 나온다. 설렜다. 소나무 한 그루 옹골차게 서 있는 바위는 경사 심하다. 경사진 바위는 미끄럼틀 같다.

하늘 향해 큰 두 바위가 합장하듯 서 있는 아래로 가자 드디어 ‘광제암문(廣薺巖門)’ 이 나온다. 한때 최치원(857~?)의 글씨로 잘못 알려져 지금도 그이가 쓴 글로 아는 이가 많다. 바위에는 통화 13년 을미(서기 995년) 4월에 혜원이 쓰고 청선이 새겼다는 글이 보인다.

 

▲ 광제암문이 새겨진 바위는 하늘을 향해 큰 두 바위가 합장하듯 서 있다.

 

여기에서 2km 더 가면 단속사가 나온다. 절이 어찌나 크던지 미투리를 갈아신고 절을 구경하고 오면 미투리가 썩는다는 말이 있다. 발우 공양 때 씻은 쌀뜨물이 무려 10리까지 흘러갔다고 한다.

천 년이 넘는 시간을 거슬러 묵직한 역사 속을 거닌 기분이다. 세상의 인연을 끊는다는 단속사의 경계에서 시간이 켜켜이 쌓인 역사의 무게를 느꼈다.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곳-단속사지

 

▲ 광제암문에서 다시 2Km 정도 더 청계호수 쪽으로 달리면 산골마을 한 가운데 석탑 두 기가 덩그러니 서있는 황량한 풍경이 나온다. 단속사지이다.

 

여기에서 다시 2Km 정도 더 청계호수 쪽으로 달리면 산골마을 한 가운데 석탑 두 기가 덩그러니 서있는 황량한 풍경이 나온다. 속세와의 인연을 끊는다는 단속사(斷俗寺)가 있던 절터이다.

 

▲ 산청군 단속사지 입구에 있는 남명 조식 선생의 시비.

 

들어서는 입구에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의 시비가 서있다. 사명대사에게 준 시‘贈山人惟政(증산인유정)’이다.

 

花落槽淵石(화락조연석) 꽃은 조연(槽淵)의 돌에 떨어지고

春深古寺臺(춘심고사대) 옛 단속사 축대엔 봄이 깊었구나

別時勤記取(별시근기취) 이별의 때를 기억해 두게나

靑子政堂梅(청자정당매) 정당매 푸른 열매 맺었을 때를

 

잠시 걸음을 멈추고 시를 나지막이 읖조렸다. 남명 선생은 유학자이면서도 성리학만 고집하지 않았다. 당시 남명 선생은 서로 공경하며 서산대사와 교류하기도 하며 제자인 사명대사에게도 시를 써서 주고, 문집에 글을 남겼다. 불교의 사찰은 많은 유생의 과거공부 장소였으며, 교유의 장소이기도 했다. 남명학파의 주요 인물은 모두 단속사에 머물거나 방문하여 그곳과 인연을 맺었다.

 

▲ 단속사지 동‧서 탑

 

1568년 서산대사가 ‘유불도(儒佛道)’가 이루려 하는 것은 다르지 않다’라는 취지로 불교(선가귀감), 도교(도가귀감), 유교(유가귀감)의 좋은 내용들을 정리하여 합본한 <삼가귀감> 목판이 단속사에 있었다. 당시 향시에 선발된 진주 인근의 유생 10명이 공부하고 있었는데 성여신과 그 일행이 깨부수고, 절집의 오백나한과 사천왕상 모습이 괴기스럽다며 불을 질러버렸다. 23살의 성여신은 <삼가귀감>에 유가의 글을 맨 마지막에 두었기에 그러했다는 것이다.

성여신이 단속사 훼철 사건 다음 날 선생을 찾아갔다. 남명 선생은 “만약 그 일을 먼저 알았다면 어찌 내가 권장했겠는가? 이미 지난 일을 더는 허물하지 않겠다. 만년에 큰 인물은 조년(早年)에 격앙(激昻)하고, 중년에 점점 평정한 대로 나아가니, 젊을 때부터 벽돌을 쌓아 어찌 진취할 수 있겠는가? 공자께서 광간(狂簡)한 자를 취한 것은 이 때문이다. 다만 판목을 불태운 것은 애석할 만하다. 만약 정밀한 톱으로 판목을 절단하여 활자로 삼아 우리 유가의 책을 인쇄할 수 있었다면 저들의 무용지물을 취하여 우리의 유용지기로 삼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또한 좋지 않았겠냐”라고 했다. 선생도 <삼가귀감>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단속사 훼손은 권장할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성여신의 기개를 높이 샀다.

 

▲ 단속사지 서탑은 파손이 심한 편이다. 1967년 해체 보수 때 서탑의 일층 몸돌의 윗부분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넣는 둥근 모양의 사리공이 확인되었다.

 

시비를 뒤로하고 걸음을 옮겨 동과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쌍탑으로 향했다. 쌍탑은 통일신라 시대 단속사의 법당자리 앞에 서 있었던 탑이다. 기단은 이중으로 아래 기단은 각 면이 하나의 돌로 구성되어 있으며, 수평을 이루고 있는 지붕돌 아래에는 다섯 개의 주름이 있다. 서탑은 파손이 심한 편이다. 1967년 해체 보수 때 서탑의 일층 몸돌의 윗부분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넣는 둥근 모양의 사리공이 확인되었다.

 

▲ 산청군 단속사지 근처에 핀 홍매화

 

탑을 구경하는 뒤로 얼굴 붉힌 홍매화가 향긋한 향내로 유혹한다. 매화 꽃망울이 톡톡톡 소리를 내듯 피었다. 단속사 터 뒤 정당매(政堂梅)로 향했다. 아쉽게도 정당매는 2014년 고사해 후계목이 자라고 있었다. 정당매는 이른바 과거 고시생이었던 강회백(1357~1402)이 단속사에 머물며 과거 공부를 할 때 심은 매화다. 강회백이 고려 우왕 2년(1376년) 급제, 정당문학(政堂文學, 종2품)겸 대사헌에 이르자 매화를 정당매라 불렀다. 강회백은 46세로 일생을 마치기 전에 정당매를 찾아 시 한 수를 읊었다.

 

▲ 산청군 단속사지 정당매(政堂梅). 정당매는 2014년 고사해 후계목이 자라고 있었다.

 

우연히 옛산을 돌아와 찾아보니/ 한그루 매화 향기 사원에 가득하네/

나무도 옛 주인을 능히 알아보고/ 은근히 눈 속에서 나를 향해 반기네/

 

▲ 산청군 단속사지에 있는 정당매각. 강회백이 고려 우왕 2년(1376년) 급제, 정당문학(政堂文學, 종2품)겸 대사헌에 이르자 매화를 정당매라 불렀다. 강회백은 46세로 일생을 마치기 전에 정당매를 찾아 시 한 수를 읊었다.

 

남명 선생은 고려와 조선에 걸쳐 벼슬살이를 한 강회백의 처신을 비판했다. ‘昨日開花今日花(작일개화금일화) 어제도 꽃은 피고 오늘도 꽃은 피네.’라는 시 구절이 그것이다.

 

▲ 산청군 단속사지에서 100m 떨어진 곳에 있는 당간지주.

 

돌아 나와 100m 거리에 있는 당간지주를 보러 갔다. 솔숲 사이에 있는 당간지주는 바로 앞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서 있다. 길이 356cm, 지름 50cm의 당간지주 2기가 윗부분이 떨어져 나간 채 방치된 것을 1984년 1기를 복원하고 1기는 부분만 복원해 현존하고 있다.

아스라이 쌓인 시간의 풍경을 엿보았다. 시간을 담은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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