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삶에서는 권력에 대한 욕망과 잦은 변절만이 엿보인다.

박정희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지지율 조사에서 여전히 1,2위를 다투며 국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다. 많은 국민들은 그가 ‘조국과 민족을 사랑한 지도자’라 믿는다. 과연 그럴까. 그가 대통령이 되기 이전 살아왔던 삶을 돌아봤다. 그의 삶에서는 ‘조국’이나 ‘민족’에 대한 사랑보다 ‘권력’을 향한 욕망과 잦은 변절만이 엿보였다. 인간 박정희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 박정희 전 대통령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17년 경북 구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빈농이었지만, 자식이 많았다. 무려 5남 2녀, 그때 당시 기준으로는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다. 어쨌든 박정희는 남매 중 막내였다.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들판에 나가 전쟁놀이를 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박정희는 1926년, 그의 나이 10세가 되던 해에 구미 공립 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성적은 우수했다. 이 때문에 이후 당시 명문이던 대구 사범학교에 진학했고, 1937년 다소 저조한 성적이지만 사범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당시 대구사범은 명문이었기에 저조한 성적이나마 이를 무사히 졸업한 점은 칭찬받을 만 한 일이다. 그는 이 시대에 공부 꽤나 하는 엘리트였다.

졸업 후 박 전 대통령은 3년간 교사생활을 한다. 하지만 교사생활이 적성에 맞은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이후 일본 순사들이 차고 다니는 긴 칼을 차 보고 싶다는 욕망 하나로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한다. 당시 만주국은 일본 관동군에 의해 세워진 괴뢰국가였다. 만주군관학교를 박 전 대통령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게 된다. 그리고 더 큰 꿈을 그렸던 이유인지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편입한다. 여기서도 그는 기량을 뽐내며 졸업한다.

임관 후 그는 만주군 예하 보병 8단에서 근무한다.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대한독립을 위해 만주와 연해주, 상해와 충칭 등지를 오가며 자신의 한 목숨을 바칠 때, 박 전 대통령은 자신의 조국을 침탈한 일본에 충성을 맹세했던 셈이다. 만주군에 근무하며 그가 어떠한 일을 했는지에 대해선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일각에선 그가 독립군을 진압하는 '간도특설대' 임무를 맡았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던 중 1945년 갑작스럽게 광복이 찾아온다. 일본군 장교였던 박정희는 다급했다. 친일파로 손가락질 받고 처단될 것이 두려웠던 이유다. 그는 일본 군복을 벗고 베이징으로 건너간다. 세를 불리고 있던 광복군에 가담하기 위해서다. 광복군에 가담하는 것은 그에게 신분 세탁을 가능하게 했다.

박정희는 광복군에 가담한 후 국내로 돌아온다. 그리고 1946년 조선경비사관학교(현 육군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교한다. 그가 입교한지 열흘도 지나지 않아 대구에서 10월 인민항쟁이 발생하고, 이 사건으로 인해 사회주의자이던 그의 형 박상희는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그의 죽음은 박정희를 남로당으로 이끈다. 당시만 해도 우파와 좌파의 대립 속에서 좌파가 집권하게 될 것이란 예측이 높았는데, 이 점도 그의 입당을 재촉했다.

남로당 입당 후 박 전 대통령은 남로당이 군부에 심어놓은 프락치(간첩)로 활동하게 되고, 1948년 10월 여순사건이 터지면서 토벌사령부에 작전장교로 차출된다. 그러나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반공을 내세우며 군내 남로당원을 색출 중이었는데, 박정희가 남로당원이라는 사실이 탄로난 것이다.

그는 체포된다. 고초를 당한다. 그러나 살아남는다. 심문과정에서 군부 내에 존재하던 남로당원의 명단을 죄다 불어준 이유다. 자기 조직의 명단을 다 불어준 사람은 다시 그 조직에 돌아갈 수 없다. 이 때문인지 그에 대한 처벌은 미약했다. 처음에는 무기징역, 이후 다시 징역 10년, 그리고 형 집행 면제로.

그는 좌익혐의에도 불구하고, 당시 인재가 부족했던 상황 덕분에 육군본부 정보국에 비공식 문관으로 복직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 뒤 한국전쟁이 터지자 현역으로 복귀한다. 그는 자리를 옮겨가며, 기회주의적인 처신을 해가며, 역동의 시기를 견뎌냈다.

한국전쟁 후 박정희는 장성이 된다. 그리고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 장갑차를 이끌고 한강을 건넌다. 그 유명한 5.16쿠데타다. 그는 쿠데타에 성공한다. 그리고 얼마 후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 후 1979년 10월 26일까지 그가 이 땅에서 저지른 여러 사건들은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잘 알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기록을 돌아보면 그는 민족과 나라를 사랑한 지도자가 아니었다. 권력을 향해 거침없이 돌진했던 기회주의자라는 평가가 더 합당하다. 황국신민을 길러내는 교사에서, 황국군의 장교로, 해방 이후 광복군으로, 국내에 들어온 뒤 공산당 당원으로, 그리고 다시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는 독재자로서의 삶. 그의 삶의 궤적은 카멜레온과 같았다.

저작권자 © 단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