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의 실험

아들이 수면 독립을 선언했다. 사실 그동안 아들은 혼자 잠들기 무서워 해서 밤마다 이불을 들고 안방으로 달려오기 일쑤였다. 남편은 덩치만 큰 아기라고 놀려댔다. ‘그럴 수도 있지’ 라며 아들을 감싸면서도 내심 걱정이 됐다. 저렇게 마음이 여리고 겁이 많아서 어쩌나. 좀 더 대범하게 키우지 못한 스스로를 탓하기도 했다. 그랬던 아들이 이제야 아니, 이제라도 자기 방에서 혼자 자겠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래, 너는 조금 늦게 피는 꽃이었어. 기다리면 되는 걸 괜히 조바심 냈구나. 흡족해 하며 아들의 수면 독립에 박수를 보냈다. 물론 아침에 깨울 때마다 피곤해 하는 건 여전했다. 그래도 모처럼 홀로 수면에 성공한 아들의 기를 꺾고 싶지 않아 어르고 달래가며 깨웠다. 다들 이렇게 성장하는 거지.

▲ 재인 초보엄마

그러던 어느 새벽, 남편이 화장실에 갔다가 아들의 방에서 불빛이 새어나와 문을 열었더니 허걱. 그 새벽에 아들이 스마트폰을 열나게 하고 있더란다. 아침에 남편의 말을 듣자마자 속에서 마그마가 폭발했다. 침대를 통째로 던져버리고 싶은 걸 어떻게 참았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불 꺼진 방이 무섭다고 달려오던 아들이 혼자 잔다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모두가 잠든 시간, 몰래 일어나 스마트폰을 켰을 아들을 떠올리니 배신감이 쓰나미처럼 몰려들었다. 그래서 아침마다 그렇게 정신을 못차렸구나. 낮엔 또 얼마나 피곤했을까. 학원가서도 실컷 자다 온 건 아닌지 별의별 상상이 다 들었다. 이 요물 같은 스마트폰.

아침 8시, 스마트폰을 침대 맡에 툭 던져놓고 아들을 깨웠다.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눈도 뜨지 못하고 비몽사몽인 아들에게 저음으로 말했다. “앞으로 일주일간 휴대폰 압수한다.” 녀석은 당황한 듯 했으나 이내 사태를 파악하고 순순히 일어나 화장실로 사라졌다. 당장 아들의 스마트폰 전원을 끄려했으나 비밀번호를 풀 수 없었다. 거칠게 아들을 불렀다. “비밀번호 뭐야?” 이전까지는 사생활 보호 차원에서 일체 알려고 들지 않았던 비밀번호였다. 지나친 방목이 작금의 사태를 초래했다고 분석하며 전원버튼을 힘껏 눌렀다.

첫째 날, 아들은 공허한 눈빛으로 허둥거렸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엄마,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요” 일종의 금단증상으로 이해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그동안 스마트폰에 빼앗겼던 시간들을 되찾기를 바랐다. 몸에 밴 스마트폰의 독성을 마지막 단 한 방울까지 없애고 말리라! 그리고 아들은 동생의 주위를 기웃거렸다. “오빠가 이 게임 풀어줄까?” 눈만 마주치면 으르렁대던 동생과의 관계도 잘하면 회복할 수 있을 듯. 시끄럽던 집안이 조용해질 수도 있겠어. 좋은 기회야.

시간이 남아돈다는 아들을 위해 책을 사고 스케치북도 몇 권 샀다. 아들은 그림을 좋아했다. 그런데 남는 시간 동안 아들은 배를 깔고 만화책만 줄창 봐댔다. 또한 동생의 게임을 대신 봐 준다는 핑계로 접근해서 동생의 스마트폰을 아예 자기가 차지하려 들었다. 그 꼴을 봐줄 수 없는 동생은 빽빽 소리를 질러댔고 집안은 여전히 조용할 새가 없었다. 우리 부부도 일조했다. 아들 못지않게 우리 부부도 스마트폰을 많이 본다는 사실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집에 오면 남편은 드러누워 게임을 했다. 아이들 앞에서 보기 좋지 않다는 지적에 남편은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라며 반발했다. 나는 수시로 올라오는 뉴스를 확인한다는 명목으로 폰을 계속 열었다. 굳이 몰라도 아무 상관없는 연예인 가십기사가 대부분이었다. 문득 맹자 어머니가 떠올랐다. 와이파이가 안 터지는 곳으로 이사는 못 가도 스마트폰을 자제하는 모범을 보여야 했거늘. 순간 보드게임이 떠올랐다. 당장 베란다 창고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보드게임을 꺼내 가족들을 모았다. 거실에서 온 가족이 보드게임을 하면서 시간을 같이 보내는 거야! 이 화기애애한 아이디어가 진정 내 안에서 나오다니. 보고 계신가요, 맹자 어머니?

남편은 프랑스 파리에 호텔을 세웠고 나는 스페인 마드리드에 별장을 지었다. 아들은 우주여행을 떠나고 딸은 무인도에서 황금열쇠를 발견했다. 브루마블이었다. 넷이 둘러앉아 주사위를 던지고 숫자만큼 칸을 옮기면서 우리는 함께 몰입했다. 나는 꿈에 그리던 해외 여행지의 이름을 크게 외치는 것만으로도 일종의 대리만족을 느꼈다. 비록 종이돈이지만 몇 백 만원씩 팍팍 쓰는 것도 즐거웠다. 그런데 모든 게임에는 승패가 갈리기 마련. 승부욕이 강한 남편은 아이들과 게임을 하면서도 기를 쓰고 이기려 들었고 아들은 동생이 주사위를 살살 던졌다고 고함을 질렀다. 딸은 억울하다고 항변했고 나는 남편에게 좀 져주면서 하라고 잔소리를 했다. 또다시 시끄러워졌다.

폰이 없어 불편한 건 아들만이 아니었다. 학원에서 마칠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들이 오지 않으면 걱정이 됐지만 당장 연락할 길이 없어 너무나 답답했다. 집에 혼자 있던 아들이 라면이라도 끓여먹을 때 가스 불은 잘 껐는지, 옷은 제대로 입고 나갔는지 확인을 못 해 조급증이 일었다. 내가 출근하면 아이들 일정을 대신 챙겨주시던 친정 엄마도 학원 시간이며, 버스 노선 등등 손자와 통신이 안되니 갑갑함을 호소하셨다. 남편도 은근슬쩍 편을 들었다. 봄방학 중에도 아들이 학교에서 열리는 캠프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참여한 점을 강조하며 요즘 저만한 애도 없다고 했다. 스마트폰을 압수한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마음이 흔들렸다. 내가 화난 건 아들이 스마트폰을 ‘몰래’ 했기 때문이었다. ‘몰래’에 방점이 찍혔다. 그런데 달리 보면 그만큼 열정이 있다는 증거 아닐까? 그 많던 잠을 포기해 가면서까지 하나에 빠질 수 있다는 건 열정 없인 불가능한 일이니까. 머지 않아 그 열정이 공부나 다른 일에도 옮겨갈 수 있다는 희망이 샘솟았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리고 스마트폰을 통해서 우리 가족이 소통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카톡을 주고받고 이모티콘을 날리면서 서로를 더 이해할 수 있었으므로. 스트레스 해소 차원이든 열정을 분출하는 창구나 혹은 소통의 공간, 뭐가 됐든 아들에게도 스마트폰이라는 아지트가 필요하다 싶었다. 내가 그런 것처럼. 결국 5일 만에 아들의 스마트폰은 주인을 다시 만났다. 해금(解禁)이 이틀이나 앞당겨지다니. 환희에 찬 아들의 표정을 잊지 못할 것이다. 대신 아들이 말해준 비밀번호는, 뭐였더라? 잊어버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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